[다시 빛과 소금으로]<21>남서울은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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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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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관서 예배본다, 자폐아들이 뛰논다, 하나님도 손뼉친다

서울 강남구 일원동 남서울은혜교회는 별도의 예배당이 없다. 자폐아 교육을 위해 설립한 밀알학교 내부의 체육관에서 일요일 예배를 하고 있다. 일러스트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서울 강남구 일원동 남서울은혜교회는 별도의 예배당이 없다. 자폐아 교육을 위해 설립한 밀알학교 내부의 체육관에서 일요일 예배를 하고 있다. 일러스트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하나님, 제발 제가 세상을 떠나기 전 아이를 먼저 보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1988년 그는 한 신자의 기도를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어떻게 아이가 먼저 죽기를 부모가 바랄 수 있을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기도했다. 장애아를 둔 부모들의 피눈물 나는 기도가 반드시 끝나도록 해달라고.

고 옥한흠 하용조 목사,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목사)와 함께 한국 복음주의를 이끄는 네 수레바퀴로 불려온 홍정길 목사(69·남서울은혜교회) 얘기다. 올해 말 담임목사에서 물러나는 그를 13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밀알학교에서 만났다. 1997년 자폐아를 위한 이 학교의 개교는 그 기도의 첫 응답이었다.

1975년 서울 반포에 남서울교회를 개척한 홍 목사는 강남을 기반으로 이른바 ‘잘나가는’ 목회자였다.

교회 개척 20년 만에 그는 밀알학교에 전념하기 위해 첫 둥지였던 남서울교회를 떠난다. “교회 개척은 그래도 힘 있는 사람이 해야죠. 교회는 소유하지 않아야 건강합니다.”

그래서 이 학교는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리저리 둘러봐도 교회를 찾기가 어렵다. 별도의 예배당 없이 주일(일요일) 예배는 평소 체육관으로 쓰이는 2400석 규모의 그레이스홀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6000여 명의 출석 신자 중 600여 명이 장애가 있는 신자다. 예배는 수화로 통역하며 예배 중 자폐아들이 나와 뛰고 뒹굴기도 한다. 분위기가 경건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교회를 떠난 신자들도 있지만 이제 이런 예배 광경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됐다.

학교는 지역 주민들에게 문화공간으로도 개방된다. 갤러리와 공연장, 카페가 들어서 있다.

홍 목사에게 밀알학교는 새로운 목회 인생을 안겨줬다. 학교가 우여곡절 끝에 개교한 것은 큰 축복이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매일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졸업해 집으로 복귀하면 ‘원위치’ 된다는 게 고민이었다. 그가 발견한 열쇠는 일과 돈이었다.

“아이들이 일한 대가로 푼돈을 받아 들더니 눈빛이 달라지더군요.(웃음) 아이들은 점점 자주 웃고 건강해지면서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찾아갔습니다.”

장애인의 자립을 위해서는 교육뿐 아니라 일이, 여기서 만들어진 상품을 판매할 방법이 필요했다. 재단이 위탁 운영하는 강남구 직업재활센터에서는 90여 명이 빵과 비누 등을 만들고 있다. 송파구 마천동에는 기증 받은 물품을 장애인들이 손질해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함께 하는 재단-굿 윌 스토어’가 최근 들어섰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고동락하는 그룹 홈의 활성화도 준비하고 있다.

최근 개신교 상황이 화제에 오르자 그는 심각한 표정이 됐다.

“1970, 80년대 기적 같은 부흥기를 경험한 교계 선배의 한 사람으로 후배들에게 좋은 교회와 전통을 물려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연못이 흐려도 맑은 물이 솟는 작은 샘구멍 하나만 있으면 연못은 맑아집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한국교회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아요…한밤중 통화하며 함께 걱정했었는데…”

To. 보고싶은 옥한흠-하용조 목사님
From 홍정길

한국 개신교의 복음주의를 이끄는 네 수레바퀴로 불렸던 홍정길 이동원 목사, 고 하용조 옥한흠 목사(왼쪽부터). 이들이 함께 찍은 사진은 매우 드물다. 홍정길 목사 제공
한국 개신교의 복음주의를 이끄는 네 수레바퀴로 불렸던 홍정길 이동원 목사, 고 하용조 옥한흠 목사(왼쪽부터). 이들이 함께 찍은 사진은 매우 드물다. 홍정길 목사 제공
한국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맞게 됩니다. 어느 날 정말 보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을 찾아보려고 지금껏 쌓아둔 사진을 꺼내 봤습니다.

평생 찍은 사진들이니 족히 수천 장은 넘었습니다. 그러나 참 많이 그리운 옥한흠 목사님, 하용조 목사님의 사진은 그중에서 20여 장도 되지 않았습니다. 굳이 사진을 찍지 않아도 될 만큼 가까운 사이였고, 그래서 서로 엽서 한 장 나눈 적이 없었습니다. 보고 싶을 때면 만났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한밤중이라도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옥한흠 형님, 당신이 우리를 떠난 지 벌써 1년 6개월이 됐습니다. 목사님 계시지 않는 자리가 너무 커 아직도 한쪽이 비어 있는 것 같습니다. 1968년 총회 신학교에서 처음 만난 후 같이 보낸 40여 년의 세월은 제 생애 정말 큰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5개월 전, 하용조 목사님마저 떠났습니다. 그를 향한 많은 사람의 애도는 우리에게 적게나마 위안이 됐습니다. 교회에 줄곧 비판적이던 언론마저 그의 삶을 따뜻하게 다뤄주는 것을 보고 진실한 것은 누구에게나 소중히 여겨지는 것 같아 기뻤습니다.

두 분이 이 땅에 계셨던 것이 많은 사람에게 축복이었습니다. 이 땅의 삶과 그 속에서 행한 일들, 또 떠남마저 축복이라면 그 인생이야말로 복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 목사님의 후임 문제로 이동원 목사님과 온누리교회 장로님들의 금식기도회와 회의에 참석하며 함께 기도했던 시간은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교회의 후임 선정이 축제로 끝나고 한국교회의 귀감이 된 것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두 분께 글을 쓰다 보니 정말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찾아갈 터이니 기쁨의 해후를 기다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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