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역사]<5>부산역

  • 입력 2009년 8월 12일 02시 50분


도시-바다 가르듯 추억도 갈라놓은…

《부산은 ‘중심’이 희미한 도시다. 아니, 중심은 많다. 골짜기마다, 그럴듯한 해변마다 중심이 있다. 다원적 민주주의를 닮은 도시. 바다는 모든 분열의 엔트로피를 매일 차분히 가라앉혀 주는, 부산에 내려진 축복이다. 이 바다를 육지로 잇는 관문인 부산역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경부선 개통과 함께 시작됐다. 세월이 흘렀다. 17시간 넘게 걸리던 서울행 철길의 여정은 5시간대에서 3시간대로 줄었고 머지않아 2시간대가 된다. 남인수가 1950년대 ‘이별의 부산정거장’에서 노래했던 ‘피란살이 설움’이나 ‘이별에 슬피 우는 경상도 사투리 아가씨’의 기억은 가물가물해졌다.》

99년전 세운 중앙동 옛 건물
화재로 흔적조차 없어지고
40년전 자리잡은 새 驛舍도
KTX 개통과 함께 모습 바뀌고
개발 종착역 ‘북항 프로젝트’
역 광장과 바다 이어졌으면…

도시의 기억은 개인적이기보다는 집단적이다. 사회적 상호작용이 기억을 만든다. 그런 기억이 어떤 특정한 공간에 쌓여갈 때 ‘특별한 장소’가 하나둘 만들어진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부산역은 수많은 문물과 사람을 경험했다. 연락선 부두까지 이어져 있던 철로는 한반도를 근대의 세계와 만나게 하는 관문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부산역은 지금의 부산역과는 다른 위치에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옛 부산역은 일본 도쿄 신역사보다 4년 앞선 1910년에 문을 열었다.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외벽을 감싼 르네상스 양식의 이 두 건물은 모두 일본 건축가 다쓰노 긴고(辰野金吾)가 설계했다. 오늘날의 중구 중앙동4가 부산무역회관 근처에 세워졌던 옛 역사(驛舍)의 상층부는 호텔로 쓰였다. 하지만 ‘이별의 부산정거장’ 노래가 발표된 해인 1953년 역전 동네에 난 대화재로 옛 부산역은 40년 넘는 세월의 기억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우편국과 세관 등 많은 근대 건축물이 이때 함께 폐허로 변했다.

이후 부산역은 임시역과 부산진역을 전전하다가 1969년 지금의 동구 초량동에 새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세대의 기억이 쌓이기 시작했다. 건물을 나서면 산비탈을 빼곡히 채운 집들이 마주 보였고, 드넓은 경사로를 따라 분수가 치솟는 광장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부산 시내에서 보기 드문 여유로운 광장 위에서 많은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역사는 반대편의 바다를 잊어버린 건물이다. 철로를 사이에 두고, 도시와 바다는 교감을 잃었다.

고속철도 개통에 맞춰 2004년 부산역이 증개축됐다. 그나마 쌓였던 기억을 털고 다시 시작해야 했다. 어설픈 느낌의 역사 공간을 나설라치면 에스컬레이터가 눈앞을 막는다. 분수대는 놀이공원처럼 바뀔 모양이다. 부박하기 짝이 없다. 기차를 타고 내리는 기능만 남겨진 공간. 부산역은 기억이 자꾸 단절되면서 어지럽게 유전(流轉)하고 있는 공간이다.

최근 이 유전하는 풍경 속으로 북항 재개발이라는 거대 프로젝트가 들어왔다. 도시와 유리된 계획의 한계가 곳곳에 보인다. 개발 주체에는 부산시도, 철도공사도 보이지 않는다. 자본의 욕망만을 허락할 듯한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 그 공간의 기억이 얼마나 남겨질지 의문이다. 새로운 시각에서의 논의와 검토가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최후의 부산역’을 한 번 더 계획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부산역은 이 땅의 종착역이다. 유럽 대도시의 많은 기차역처럼 열차가 역사를 관통하지 않기 때문에 지하도나 육교를 이용하지 않고도 모든 열차를 타고 내릴 수 있다. 따라서 역 광장이 바다를 향하도록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도시가 성큼 바다를 만나 확장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종착점 이후의 선로는 모두 필요 없어진다. 선로를 지하로 집어넣는 것과는 전혀 다른, 커다란 기회를 도시 전체에 제공할 수 있다. 이렇게 꾸며진 부산 종착역에서는 산과 바다를 매개하는 ‘부산다운 기억’이 쌓여갈 것이다.

기억만이 도시의 ‘특별한 장소’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자본, 권력,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 등 여러 갈래의 욕망이 함께 작용한다. 욕망은 변화를 충동하고, 기억은 변화를 억제한다. 변화는 도시의 자연스러운 본질적 속성이다. 그러나 한국의 도시에서는 기억보다 훨씬 더 큰 욕망이 넘쳐흘러 변화를 조절할 틈이 부족했다.

그런 조절되지 않은 기운이 지금의 부산역 주변에 가득하다. 변화를 조절해 나갈 수 있는 지혜를 부산역이 가진 오랜 기억들 속에서 찾아내 보자.

이종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6회는 김광현 서울대 교수의 ‘서울역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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