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답사기 30선]<19>에게-영원 회귀의 바다

  • 입력 2007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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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배운 역사, 교과서 속의 역사, 이런 것들은 전부 윤색된 것이다…가장 전통적인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언급되지 않은 역사, 후세인(後世人)이 전혀 모르는 역사가 아닐까.》

고대 그리스 문명과 역사에 대한 지식 없이 그리스나 터키, 시칠리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처음 느끼는 것은 자신의 엄청난 무지다. 초창기 인류 역사가 싹튼 이 땅에는 유적지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전설과 사연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런 무지를 마주한다는 일만큼 끔찍한 일도 없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 어떤 사람은 무지 앞에서 좌절하고 애써 이 사실을 외면하려 한다. 그런다고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이 바뀌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굳이 외면하려는 것은 그 사실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기 있는 사람들은 무지를 떨쳐 버리기 위해 어려운 도전을 선택한다. 괴롭기는 하지만 개척자 정신을 갖고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우면서 무지를 정복해 나간다.

이 기행문의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는 바로 이런 도전 정신의 소유자다. 도쿄(東京)대를 나와 일본 최고 지성 중 하나로 손꼽히는 그가 1972년 겨울 시칠리아의 셀리눈테를 우연히 들렀을 때, 잘 보존된 거대하고 멋진 그리스 신전들 앞에서 망연자실하고 만다. 그곳에 그런 유적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도시에 대한 역사 기록이 부족해서 각 신전이 어떤 신에게 바쳐졌는지 모르기에 그냥 A, B…O라고 알파벳으로 불리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눈앞에 보이는 신전이 이토록 멋지게 보존되어 있는데도 이 신전이 어떤 신전이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면, 기록된 역사란 과연 무엇인가. 오히려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훨씬 더 많은 것이 아닐까.’

그리곤 자신이 그때까지 알고 있었던 역사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 후 그는 홀린 것처럼 고대 유적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이 같은 지적 모험에 대한 그의 열정은 마침내 1982년 그리스 터키 여행으로 이어진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사진작가와 함께하는 본격적인 취재 여행이었다.

40일 동안의 여행에서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길을 돌아간다. 마치 일주일이면 도착할 이타케를 20년 동안이나 표류했던 오디세우스를 닮은 모험이다. 그 길에서 그는 가는 곳마다 새로움으로 가득한 과거의 위대한 흔적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쓰이지 않은 역사를 발견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맞아 들어가는 지적 희열을 맛본다.

이야기는 그의 마지막 방문지인 수도사들만의 공화국, ‘성산 아토스’에서 시작해서 이오니아 문명의 종말을 보여 주는 폐허, 밀레토스에서 끝난다. 이성을 포기하고 믿음에 자신을 맡겨 영원한 세계를 꿈꾸는 수도사들의 세계에서 인간 이성의 세계가 시작된 서양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의 도시로, 시간을 거스르며 ‘영원 회귀의 바다, 에게 해’를 누비는 저자의 지적 모험. 그 자체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회귀의 행동인 듯 하나의 거대한 원을 그린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그리스발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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