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이터털 선샤인

  • 입력 2007년 9월 3일 03시 01분


코멘트
지워버린 과거를 알게 된 남녀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유명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인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이터널 선샤인’(2004년).

이 영화를 본다는 건 마치 국영수와 예체능에 모두 능한 학생을 만나는 것만 같은 야릇한 경험입니다.

매우 지적이고 이성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살 떨릴 정도로 여리고 감성적인 영화니까요.

과거와 현재, 기억과 현실이 뒤엉킨 초현실적인 느낌의 이 영화에서 배우 짐 캐리가 보여준 연기는 단연 압권입니다.

미국 할리우드 최고의 코미디 배우로 평가받는 그는 여기선 고유의 희극적 표정과 과장된 제스처를 버립니다.

그리곤 쓸쓸함과 고독함에 사무치는 한 남자의 영혼을 가슴 절절하게 그려내죠.

‘순수한 마음의 영원한 햇살(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이란 시적인 문구를 원 제목으로 가진 이 영화, 단순히 러브 스토리로만 볼 게 아닙니다.

이 영화 속엔 사랑과 기억에 관한 아름답고 철학적인 성찰이

숨어 있으니까요.》

[1] 스토리라인

출근길에 오른 소심한 남자 ‘조엘’(짐 캐리). 그는 충동적으로 바닷가로 향합니다. 그는 해변에서 머리칼을 오렌지색으로 물들인 여성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즐릿)과 마주치죠. 그녀는 다짜고짜 “당신이 맘에 들어요. 당신과 결혼할게요”라면서 조엘에게 다가오고,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사랑을 시작합니다.

시간이 흘러, 둘 사이엔 권태가 찾아옵니다. 붙임성 많은 여자를 남자는 “헤프다”며 싫어하고, 신중한 남자를 여자는 “따분하다”며 싫증냅니다.

클레멘타인이 일하는 서점에 들른 조엘은 깜짝 놀랍니다. 그녀가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죠. 알고 보니, 여자는 ‘기억삭제회사’를 찾아가 자신의 뇌에 남아있는 조엘에 대한 기억을 깡그리 지워버렸던 겁니다.

분개한 조엘. 아니나 다를까, 그 역시 복수하는 기분으로 ‘기억삭제회사’를 찾아가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웁니다.

기억을 증발시켜 버린 채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고 만 두 사람. 하지만 조엘은 마술 같은 힘에 이끌려 다시 바닷가로 향하고, 또다시 클레멘타인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두 사람 앞으로 웬 녹음테이프가 배달되고, 테이프에선 두 사람이 과거 서로에 대해 쏟아냈던 권태와 증오 가득한 욕설들이 흘러나옵니다.

과거를 알게 된 조엘과 클레멘타인. 둘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2] 핵심 콕콕 찌르기

영화 ‘메멘토’(2007년 7월 31일자 이지논술)는 ‘기억과 존재’에 관해 이런 견해를 제시합니다.

‘인간에겐 뇌에 담긴 기억이 전부다. 인간은 자신이 기억하는 것만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하지 못하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기억을 조작하면 사실도 얼마든지 조작된다.’

하지만 이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메멘토’와는 상반된 주장을 폅니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고 말이죠. 기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뇌에서 삭제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또다시 우연히 만나, 또다시 첫눈에 반하고, 또다시 사랑에 빠집니다. 사랑의 기억이 비록 뇌에선 사라졌을지언정, 두 사람의 마음속에선 지워지지 않는 문신이 되어 남았기 때문이죠. 조엘에 대한 기억을 지운 클레멘타인. 그녀가 조엘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또 다른 남자 ‘패트릭’(엘리야 우드)을 만나도 결코 사랑을 느낄 수 없었던 건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사랑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유일’하고 ‘영원’한 것이죠.

너무 자의적인 해석 아니냐고요? 눈에 콩깍지가 씌어 사랑에 빠진 걸 가지고 무슨 ‘기억’이니 ‘영원’이니 하는 유식한 말을 늘어놓느냐고요?

아닙니다. 영화엔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나누는 사랑을 판박이 해놓은 듯한 또 하나의 사랑이 제시되는데요. 영화가 주장하는 바에 대한 부연(敷衍·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덧붙임)에 해당하는 이 에피소드는, ‘기억삭제회사’를 운영하는 하워드 박사와 부하 여직원 메리의 사랑입니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메리는 유부남인 하워드 박사에게 단박에 사랑을 고백했지만, 알고 보니 어땠나요? 두 사람은 이미 과거에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관계였고, 그 관계가 박사의 아내에게 발각되자 메리 스스로 박사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삭제해버렸던 것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그녀 역시 마음속에 사무친 사랑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죠.

결국 영화의 제목인 ‘영원한 햇살’이란 무슨 뜻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영원히 비추는 햇살, 즉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사랑의 기억에 대한 은유였던 것입니다.

[3] 종횡무진 생각하기

자, 이쯤 되면 이런 의문이 들 법도 합니다. ‘그럼 사랑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운명적 행위에 지나지 않을까.’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서도 현명한 답변을 해줍니다. ‘사랑은 단지 하늘이 내린 운명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가는 의지’라고 말입니다.

영화 후반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누군가로부터 배달된 녹음테이프에서 과거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서로에 대한 싫증과 미움을 줄줄이 늘어놓는 말들이었죠. 과거를 알게 된 두 사람은 깨닫습니다. “맞아. 우린 서로를 또다시 지겨워하게 될 거야”라고 말이죠.

하지만 둘은 어떤 선택을 하나요? “좋아. 그래도 사랑할래”라고 합니다. 헤어지기보다는, 다시 권태로움이 찾아올지라도 그 역시 사랑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면서 변함없는 의지로 이겨내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죠.

여러분, 이 영화 마지막에 흘러나오는 주제가 가사를 마음에 새겨 보세요.

‘Change your heart(마음을 바꿔 봐요). Look around you(당신의 주위를 둘러보세요). It will astound you(당신 주위에 있는 그것이 당신을 진정 놀라게 할 거예요).’

그렇습니다. 가장 소중한 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나의 곁에서 항상 나를 비춰 주는 ‘영원한 햇살’을 지금 꼭 찾아보세요.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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