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책여행]<7>현대물리학과 신비주의

  • 입력 2006년 5월 2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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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의 ‘초고성능 현미경’을 통해 원자 이하의 세계(예컨대 전자)를 들여다본다고 치자. 이때 우리는 현미경에 감마선을 쏘아야 한다. 전자보다 파장이 긴 일반광선으로는 전자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마선은 강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게 문제다. 감마선이 전자를 때리면 그것은 그 전자의 존재는 밝혀내지만 불행히도 전자를 제 궤도에서 쳐내어 그 방향과 속도(운동량)를 변화시키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감마선 대신 에너지가 약한 빛을 쓴다면 그 빛은 파장이 너무 길어 전자가 어디 있는지 보여 주지 못한다. 우리는 움직이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알 길이 없다! 아원자(亞原子·원자 이하)의 세계에서는 대상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현실을 관찰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게 불확정성원리의 제1차적 의의다.

동양사상에 정통한 미국의 과학이론가인 게리 주카브는 1979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춤추는 물리’(범양사)에서 하이젠베르크의 경이로운 발견을 이렇게 풀이한다.

“움직이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결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그 운동입자를 결코 ‘실제 모습대로’ 볼 수 없으며, 오직 우리가 선택하는 데 따라 그 대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철학적 함의는 현란하다. 인간은 이 세계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 현실을 창조한다! 인간이 스스로 측정할 속성을 선택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속성 자체를 지어 낸다고 해야 할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자들은 묻고 또 물었다. 우리가 운동량 측정 실험을 하기 이전에 운동량을 가진 입자가 존재했던가? 우리가 위치 측정 실험을 하기 이전에 위치가 있는 입자가 있었던가? 우리가 입자에 대해 생각하고 측정하기 이전에 도대체 입자가 존재했을까? 지금 우리가 실험하고 있는 입자들을 우리가 지어 낸 것은 아닐까?

과학자들만이 이런 의문을 좇았던 것은 아니다. 2000년도 훨씬 전에 수많은 힌두교도와 불교도도 같은 문제를 궁구했다. 혜능선사의 저 유명한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보자.

바람이 불어 깃발이 나부끼자 두 승려가 입씨름을 벌였다. 한 승려는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 했고 다른 승려는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 맞섰다. 혜능이 나아가 말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다. 움직이는 것은 너희 마음이니라….”

데모크리토스와 탈레스, 피타고라스의 학문적 후예들이 도달한 현대물리학의 자연관이 인더스와 갠지스, 그리고 양쯔와 황허 강 유역에서 태어난 주관주의 사유의 우주상과 만나고 있는 게 아닐까.

양자역학에 따르면 객관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주카브는 우리와 분리돼 ‘저 바깥(out there)’에 존재하는 외부세계란 관념에 불과하다고 자른다. 심리학자 융의 주장대로 이 세계는 우리의 내면이 연출한 것일까?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파울리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psyche)이 외향성을 띠고 바깥, 즉 물리적 세계로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원자 이하의 차원에서 객관과 주관의 구분은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우주의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 우주가 그 스스로를 드러내는 문이 되었다.

양자역학은 20세기의 선문답을 던진다.

새로운 물리학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했느냐?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회귀시켰다!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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