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답사기 30선]<17>자전거 여행

  • 입력 2007년 4월 27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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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은 낡은 시간의 몸이 아니고 생사가 명멸하는 현재의 몸이다. 이끄는 몸과 이끌리는 몸이 현재의 몸속에서 합쳐지면서 자전거는 앞으로 나아가고, 가려는 몸과 가지 못하는 몸이 화해하는 저녁 무렵의 산속 오르막길 위에서 자전거는 멈춘다.》

바퀴 위에서 문득 깨달은 삶의 축복

매일처럼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우리의 감각과 인식은 타성에 젖어 생생한 활력을 지니지 못한다. 일상은 감흥을 주지 못하고, 우리는 진정한 의미를 묻지 못한 채, 존재와 세계를 그저 지나쳐 간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이런 되풀이 속에서 삶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은 일상 ‘안’의 나만이 아니라, 일상 ‘밖’에 감추어져 있는 나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 있는 나를 찾고 싶을 때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물론 우리에게 ‘밖’인 여행지 역시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일상 ‘안’의 터전이다. 그러니 문제는 떠남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와 세계를 느끼고 인식하는 시선의 차이일 것이다. 타성에 젖어 보는가, 아니면 새롭게 보는가. 게다가 우리들 대부분은 일상의 이런저런 일에 묶여 매일처럼 떠날 수는 없다. 따라서 친숙하다 못해 진부한 일상의 굳어진 감각과 인식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세계와 삶을 새롭게 느끼고 싶을 때, 우리는 여행자의 기록을 펴 든다. 소설가 김훈 씨의 ‘자전거 여행’은 그때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기록이다.

전남 여수 돌산도 향일암, 담양 소쇄원, 순천 선암사, 경북 경주 감포 등 우리 국토 곳곳에 배어 있는 생명력과 문화의 흔적들. 자전거 ‘풍륜’을 타고 떠난 이 여행은 20세기의 마지막과 첫머리에 걸쳐 이루어졌다. 외환위기의 환란 속에 삶은 요동치고, 사람들은 충격과 당혹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그 역시 오랜 언론인 생활을 마감하고 늦깎이 글쟁이의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50대 초반 그의 앞에 주어진 시간은 자유이자 공포였을 것이다. 김훈 씨는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막막한 시간의 빈자리에 명료한 이름을 부여하는 것, 그것만이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출구였다. 그는 자전거와 함께 그 시간의 길을 저어 갔고, 마침내 지나온 길에다 ‘사는 일과 목숨의 아름다움’이란 이름을 붙인다. 그 길은 남도 끝의 바다에서 태백산맥의 깊은 골짜기까지 이어져 있다. 페달에 얹은 두 발과 온몸의 근육을 통해 얻은 그 이름이야말로 우리의 국토에 바쳐진 최고의 헌사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나는 이 ‘자전거 여행’이 ‘한국 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라 불린 그의 대표작 ‘칼의 노래’와 쌍둥이라고 생각한다. ‘사는 일과 목숨의 아름다움’이란 이름을 찾지 못했다면 그의 ‘칼’ 역시 ‘노래’를 부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여행은 그 자신을 포함하여 20세기 말 너무도 쓰린 상처를 겪어야 했던 이 땅의 사람들을 위무하는 절절한 노래였다. 나 역시 짧지 않은 외국생활을 청산하고 들어와 겪어야 했던 ‘세기말’의 막막함을 이 사랑의 말들을 통해 건너갈 수 있었다.

나날의 삶에 지칠 때, 살아 있음의 기쁨이 잘 느껴지지 않을 때, 나는 기꺼이 김훈 씨의 ‘자전거 여행’을 펼쳐 든다. 몸을 통해 전해지는 국토와 생명이란 에너지의 폭발, 오늘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그 뜨거운 기록을 읽는 일은 복되다.

박철화 중앙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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