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청소년 역사강좌]제6강 ‘한국전쟁의 세계사적 의의’

  • 입력 2004년 11월 8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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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21층 강당에서 열린 ‘2004 청소년역사강좌’ 제6강 ‘한국전쟁의 세계사적 의의’에는 300여명의 관객이 참석해 한국전쟁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나타냈다. -원대연기자
6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21층 강당에서 열린 ‘2004 청소년역사강좌’ 제6강 ‘한국전쟁의 세계사적 의의’에는 300여명의 관객이 참석해 한국전쟁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나타냈다. -원대연기자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북한 중국 소련 공산 3국의 긴밀한 사전 협의와 합의, 그리고 준비 끝에 일어난 것입니다.” 김영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6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사 21층 강당에서 열린 ‘2004 청소년 역사강좌’의 제6강 ‘한국전쟁의 세계사적 의의’ 강연에서 구소련과 미국의 비밀문서 등을 근거로 한국전쟁의 발발과 전개과정을 논리적으로 풀어나갔다. 300여명의 관객이 강연장을 가득 메웠고 일부는 자리가 없어 서서 들어야 했다. 김 교수가 “과거사 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민족을 참혹한 고통 속에 빠뜨린 김일성에게 먼저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서 강의를 마치자 일부 관객들은 박수로 화답하기도 했다. 다음은 강연 요지.》

● 스탈린 승인만 기다린 김일성

김일성은 1949년 내내 스탈린에게 남침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1949년 3월 5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은 남침의사를 밝혔지만 스탈린은 “남한이 침범할 경우에만 북한은 반격할 수 있다”며 반대했다. 10월 14일 북한이 소련의 사전 승인 없이 옹진반도에서 대규모 분쟁을 일으키자 소련 정치국은 10월 27일 스탈린의 지시 없이는 어떤 국경분쟁도 도발하지 못하도록 지시문을 보냈다. 이후 다음해 6월 24일까지 38선에서는 한 건의 국경분쟁도 없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남북 국경분쟁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했다는 해석은 사실과 다르다.

● 스탈린의 한국전쟁 승인

1949년 10월 중국이 공산혁명에 성공하자 스탈린의 태도에 변화가 나타났다.

1950년 1월 17일 김일성은 북한 주재 스티코프 소련대사를 통해 “이제는 한반도 차례”라며 스탈린에게 남침을 승인해 줄 것을 다시 요청했다. 얄타협정을 폐기처분하기로 결정한 스탈린은 1월 30일 김일성에게 남침을 지원할 의사가 있으며, 이런 일은 사전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2월 스탈린은 바실리예프 중장을 북한에 파견해 남침계획을 세우게 하고 T-34탱크 등 무기를 지원했다.

5월 13일 김일성은 마오쩌둥(毛澤東)을 만나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 중국군을 파견하겠다”는 동의를 받아냈다. 6월 25일 오전 4시40분 북한은 남침을 개시했다.

● 미국과 중국의 개입

전쟁 발발 7시간 뒤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한국 문제를 회부한 뒤 29일 한국전쟁은 한반도 내에 국한돼야 한다고 지시했다. 30일 오전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지상군 투입을 요청했고 트루먼은 2개 사단 투입을 지시했다.

미소 합의로 그어진 38선은 국제적 세력분할선인 동시에 미국의 소련 봉쇄선이었다. 또 한국은 미국과 유엔의 협조로 성립된 국가였다. 한국의 적화는 미국의 위신과 신뢰에 손상을 주는 일이었고, 나아가 미국의 소련 봉쇄전략의 핵심인 5개 중심지역론(미국 영국 소련 서구유럽 일본) 중 일본의 안보를 위협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했다. 9월 30일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중국군 투입을 요구했다. 10월 25일 압록강을 건넌 중국군 수십만명이 기습 공격했고 유엔군은 패퇴를 거듭했다.

맥아더는 중국군 근거지인 만주 폭격을 주장했지만 ‘한반도 제한전’을 천명한 트루먼은 1951년 4월 12일 맥아더를 해임했다. 만주를 공격했다면 통일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만주로까지 확전됐다면 소련은 중소우호동맹조약에 따라 지상군을 투입했을 것이다. 또 미 합참의 비상전쟁계획에도 소련과 전면전이 벌어지면 한국에서 철수해 일본 방위에 전념한다고 돼 있었다.

● 한국전쟁의 세계사적 의의

한국전쟁은 미소 양국에는 ‘제한전’이었지만 우리 민족은 세계대전과 같은 고통을 겪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한 미소는 서로 합의한 봉쇄선을 군사적으로 넘지 않았다.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승인한 속셈은 한반도의 적화를 이뤄 미소 대결에서 승기를 잡으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이런 스탈린에게 우리 민족이 겪을 파괴적 결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남침 승인과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김영호 교수는:

김영호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45)는 서울대 외교학과와 미국 보스턴대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3년여 동안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과 트루먼 대통령 기념관 등에서 한국전쟁 관련 자료 수집과 연구를 거친 끝에 1996년 미 버지니아대에서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과정 연구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신여대 동아시아연구소 소장과 한국국제정치학회 외교사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1998년), ‘통일한국의 패러다임’(1999년) 등이 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제6강서 쏟아진 질문들▼

한국전쟁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듯 강연이 끝나자 10여명의 관객들이 질문을 하려고 손을 들었다. 일부 관객들은 정해진 질의응답시간이 끝난 뒤에도 강사인 김영호 교수를 붙잡고 질문을 했다.

남진희양(17·염광고 2년)은 “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적국이었던 일본이 소련 봉쇄정책의 핵심인 5개 중심지역이 될 수 있었는가” 하고 물었다.

김 교수는 “5대 중심지역은 기술 인력 보급력 등의 힘을 갖춘 지역으로 미국 영국 소련 서구유럽 일본을 말한다. 미국은 소련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소련을 봉쇄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아시아에서는 일본만이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판단해 중심지역으로 선정한 것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현실은 그만큼 냉정하다”고 말했다.

기지훈씨(23·한국과학기술원 전자과 4년)는 “왜 미국은 한국전쟁 전에 한반도에서 전쟁 억지력을 발휘할 수 없었느냐”고 물었다.

김 교수는 “미국은 한국을 방어대상에서 제외한 1947년 동아시아지역 비상전쟁계획에 따라 주한미군을 철수했고, 한국의 한미동맹 체결 요청도 거부했다. 현실적으로도 미국은 지상군 병력이 부족해 계속 주둔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미국의 남침 유도설은 사실이 아니다”고 답했다.

60대의 한 남성은 “맥아더의 만주 폭격이 이뤄졌다면 한반도 통일도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 교수는 ‘만주확전론’의 불가능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1951년 3∼4월 미국은 가용 전투병력 8개 사단을 한반도에 모두 투입했습니다. 미 합참은 새 사단을 꾸리는 데 6개월이 걸린다고 판단했고요. 따라서 만주까지 치고 올라갈 병력이 부족했습니다. 또 미국 정부도 중국 본토 진입은 절대 안 된다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었어요. 만약 미국이 만주에 들어갔다면 베트남전의 악몽을 20년 먼저 겪게 됐을 겁니다.”

▼전쟁세대-신세대 즉석토론▼

강연이 끝난 뒤 전쟁을 겪은 박준순씨(69·가운데)와 10대 최석은군(17·왼쪽), 20대 정동기씨(21)가 즉석토론을 별였다. -원대연기자

중학생 때 한국전쟁을 겪었다는 박준순씨(69·전우신문사 편집위원)와 학교수업과 책으로만 전쟁을 간접 경험한 정동기씨(21·여·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3년), 최석은군(17·잠실고 2년)은 강연 후 즉석토론을 벌였다.

최군은 “학교에서 배우거나 책으로 읽은 한국전쟁과 김 교수님의 강연 내용이 아주 달랐다”고 입을 열었다. 최군은 “역사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내용이나 읽은 책들은 ‘미국이 1950년 1월 극동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하는 ‘애치슨라인’을 발표한 뒤 이에 반발한 이승만 대통령이 북침을 준비,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식이다”라고 말했다. 이 역사강좌를 거의 빠짐없이 듣고 있다는 최군은 “‘진보적’이라는 교과서도 일부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씨는 “그건 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 유행한 미국 수정주의 학파의 주장”이라며 “그러나 소련에서 한국전쟁 관련 비밀문서가 공개된 뒤 그들의 주장은 근거를 잃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최군의 말에 다소 충격을 받은 듯 “젊은이들이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역사를 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좀더 객관적 사실에 관심을 갖기 바란다”고 조언했다.

정씨는 “한국전쟁은 한반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사적 문제로 봐야 실체가 드러난다고 생각한다”며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간의 역학관계 속에서 벌어진 한국전쟁을 교훈삼아 앞으로 주변 강대국을 이용할 줄 아는 외교정책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주 토요 역사강좌 안내(제7강)▼

▽일시=13일 오후 3∼4시반

▽장소=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21층 강당

▽주제 및 강사=‘분단국가의 형성, 1945∼1948년’(이완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정치학)

▽제7강의 이해를 돕는 책

△한국분단보고서(신복룡·김원덕 엮음·풀빛·1992년)

△한국분단사(조순승·평민사·1982년)

△한반도의 분단과 미국(제임스 매트레이·을유문화사·1989년)

■강좌에 관한 사항은 성신여대 동아시아연구소(02-920-7089)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동아닷컴(www.donga.com)'2004 청소년 역사강좌' 코너에 실려 있습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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