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정숙자,“바위”

  • 입력 2004년 7월 18일 18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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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정숙자

아니 되는데,

다시 틀 눈 하나쯤

남겨 두었어야 했는데

흥부네 박꽃 앞질러

욕심껏 영글어 버린 목숨

조약돌마저 배워

그 분수,

배워도 열심히 배워

앞뒤 없이 캄캄한 一家

천 년을 보내고, 또

천 년을 내리 구른들

어쩌나, 저 벙어리

육칠월 모기도 안 무는 얼굴

시집 ‘정읍사의 달밤처럼’(한국문연) 중에서

‘주먹바위 눈을 쪼개 밭고랑에 심어 볼까나. 자주꽃 핀 건 파보나마나 자주 바위, 하얀꽃 핀 건 파보나마나 하얀 바위-. 아가 아가 며늘아가, 폭신폭신한 햇바위를 굵은 소금에 찍어 먹을까나. 에구 삶은 바위도 이빨이 없어 못 먹겠다. 너나 실컷 먹거라.’

비얄밭 날망에 호미처럼 허리 굽은 할매, 감자를 놓으며 중얼거리는 걸 보니 말이 빠져 이빨이 헛나갔는지, 노망이 난 것도 같은데 감자씨 놓는 걸 보니 자로 잰 듯 똑 고르다. 오리걸음으로 한 고랑 놓고, 밭 가운데 솟은 너럭바위에 앉아 숨 고른다. 흙고물 묻은 먹 고무신 바위 등에 대고 털며 말하노니,

‘바위야, 천 년을 살아도 꽃 한 번 못 피면 무슨 소용이랴. 요 무른 감자, 한 해를 살아도 두 발 짐승 주린 창자들 다 채워주고 봄마다 새로 꽃핀단다. 명년에 나 가고 새로 올 양이면 바위보다 감자꽃으로 올란다. 너무 영글어 육칠월 모기도 안 무는 너럭바위야, 너도 딴딴한 마음 한 구석 허물어 검버섯 같은 바위꽃 하나 피우지 않으련?’

반칠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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