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기 세상읽기]김형국/도서관은 '책창고'가 아니다

  • 입력 2002년 8월 23일 17시 26분


차는 언제 마시면 좋은가. 마신 지 한참 만이라 ‘차 고플 때’ 마심이 좋은 것은 세상이 아는 바다. 하지만 금방 마시고 난 뒤도 좋다는 것이 영국, 중국의 차 중독자의 말. 마찬가지로 책은 언제 읽으면 좋은가. “휴가철 여름이다”, “아니다, 등화가친 가을이다” 같은 말은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다 부질없는 소리. 계절 불문이고 주야 불문은 당연하며, 책을 손에서 놓자마자 금방 다른 책을 잡으면 그 아니 좋은가.

그런데 “책의 선택은 인생의 선택”이란 말이 진실이라, 책 고르기가 쉽지 않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가르침의 근본은 학생들에게 좋은 책을 권하고 그걸 꼭 읽게 만드는 것이라 믿기에 더욱 양서(良書) 식별이 고심거리다.

양서 읽기는 누구에게나 바람직한 노릇이기에 정부도 도서관 운영에 적극 나선다. 하지만 국가나 지방이 좋은 도서관 갖기가 그리 간단치는 않다. 좋은 책 확보는 눈이 밝은 사서가 있어야 하고, 책 살 돈도 넉넉해야 한다.

책 읽기가 직업인 나도 어쩌다 책을 펴내는 저자가 된다. 가르치던 분야를 정리하면 더러 학교 바깥에서도 구해 읽으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출판사가 공감해줄 때 성사된다. 그러나 고시나 취업용 교과서류가 아닌 학술서적은 발행부수가 1000부, 잘해야 2000부가 고작일 정도로 시장이 좁다.

이런 형편에서 “어느 글이든 그걸 가장 열심히 읽는 독자는 필자 자신”이란 말이 틀리지 않아, 힘겹게 펴낸 책을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구입하는 사람도 저자 자신이기 쉽다. ‘제살 깎아 먹기’ 식으로 나도 내 책을 출판사에서 적잖이 구해서 동학(同學)들에게 보낸다. 하지만 주위의 반응은 대체로 맹맹하다. 수준 급 책이 아닌 탓인지, 아니면 책은 공짜라는 인식 탓인지 모를 일이다.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 잘 받았다는 말을 전해 들으면 그 전화 한 통이 여간 고맙지 않다.

얼마 전 뜻밖에 한 광역시 산하 공공 도서관에서 편지가 왔다. 올 봄에 지방 발전정책이 경쟁력을 갖자면 문화적 시각을 접목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책을 펴냈는데, 그걸 고맙게 소개해 준 신문기사를 읽었음인지 도서관이 꼭 구비해야 할 책이라 부추기면서 출간을 치하해 준다. 얼마나 고무적인 말인가.

그러나 그 다음 말에 어리둥절해진다. 한 부 기증해주면 지역주민의 정보욕구에 충실히 부응하겠다는 것.

그 도서관이 지역의 중추적 정보센터라 자랑했다. 그럴 만도 싶었다. 도심 외곽에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전용 ‘대도시내 신도시’를 품고 있는 광역시이기 때문이다. 컴퓨터 시대에 아무리 정보처리가 광속(光速)화 되었다 해도 사람의 기억을 거치지 않은 정보는 무용지물이기 십상이니, 기억을 담은 책 확보는 필수적이다. 그리고 장서량이 40만 권을 넘는다고 자랑했다. 구닥다리 책을 빼면 우리의 웬만한 대학 도서관도 거기에 못 미칠 분량이다.

학술서적은 발행부수가 많은 소설류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싸다. 두루 사기엔 값비싼 학술서는 전공학생들마저 그 흔한 복사기를 이용해서 필요 지면만 복사해서 읽는다. 무단 복사는 저작권법에 어긋나지만 학생들에겐 그걸 묵인하는 것은 국내외 관행이다. 대신, 미국 등지는 대학도서관 등 공공도서관이 사주기에 전문서 출판문화가 가능하다.

전문서를 사줄만한 우리 공공도서관은 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2개 국립을 필두로 시립·도립 공공도서관이 171개, 대학도서관이 172개, 연구소 등에 딸린 전문·특수도서관, 교회 등에 부설된 기타 도서관 등 총 462개에 이른다. 도서관도 전문화되어 있는 까닭에 성격상 내가 펴낸 전문서를 비치할 만한 곳은 많아도 백 곳이나 될 것인가. 게다가 내 책에 관심을 가진 도서관마저도 기증을 간청하고 나섰으니 전문서의 기관시장은 불모에 가깝다는 뜻이다.

공공 도서관의 앵벌이식 도서확보는 우리의 출판관행 탓일 수도 있다. 출마 예정 정치지망생의 반생기, 대체로 있으나 마나한 교수들의 회갑 또는 퇴임기념논문집이 쏟아져 나온 뒤 도서관 등에 무료 배포됨도 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옥석을 가리는 것 또한 도서관의 몫이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지식이 공짜일 수 없다. 그리고 양서를 비치하는 독자서비스에 더해서 저자 보호도 도서관에 맡겨진 소임이다. 거저 얻은 책도 포함해서 단지 장서권수 늘리기에 급급한 도서관이라면 그건 정보센터가 아닌 책 보관 창고일 뿐이다. 이게 국민 세금으로 받드는 국공립도서관의 참 모습일 수는 없지 않은가.

김형국 서울대교수 kimh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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