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속의 에로티시즘]佛 그레이社의 에이즈 예방 광고

  • 입력 2002년 4월 18일 14시 47분


호박 마차에 탄 신데렐라가 말한다. '내 부드러운 왕자님, 이것 먼저 착용하세요.'
호박 마차에 탄 신데렐라가 말한다.
'내 부드러운 왕자님, 이것 먼저 착용하세요.'
어릴 적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옛 이야기는 귀에 척척 감겨 들어 왔다. 같은 이야기라도 할머니의 입담에 의해 조금씩 변주되는, 고무줄처럼 줄어들었다 늘어났다 하는 얘길 듣고 있노라면 그 감칠맛 나는 생동감에 마치 가상의 세계에 속해 있는 느낌을 받곤 했다. 민담이라 불리는 예부터 구전되어 온 이야기는 상상과 공상으로 채색되어 있기에 내러티브의 구조만 다를 뿐 PC를 통해 사이버 세상을 경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민담은 시대를 거치면서 변화를 겪으며 전해 오는데 그 저변에 변화하지 않는 불변의 보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권선징악, 인과응보 따위의 도덕적 내용과 어려운 시련을 이겨 내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따위의 소위 해피엔딩의 구조가 그 보편성을 이룬다.

프랑스의 그레이(Grey) 광고사에서 제작한 에이즈 예방 공익광고는 신데렐라와 아라비안나이트 두 편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항상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일을 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 신데렐라(재를 뒤집어 쓴 아이라는 뜻이다)는 유럽에서 옛날부터 구전되던 대표적인 의붓자식 이야기로 알다시피 계모에게 천대받던 구박덩이가 신분 높은 왕자와 결합한다는 전형적인 해피엔딩의 플롯을 가지고 있다. 이 광고는 그 행복한 결합이란 주제에 마차 속에서 벌어지는 섹스를 첨부했다. 그림에는 호박마차 속에 실루엣으로 비치는 신데렐라의 두 다리와 벗겨진 신발, 벗겨져 뒹구는 브래지어와 팬티가 보인다. 카피는 “내부드러운 왕자님, 이것(콘돔) 먼저 착용하세요”다. 아라비안나이트 편에서는 베란다에서 달빛을 받으며 스탠딩 섹스를 나누는 샤푸리 야르 왕과 그를 사로잡은 세헤라자데의 모습이 보인다. 카피는 “밤은 아름다웠고 별은 빛났습니다. 세헤라자데는 콘돔을 꺼냈습니다”이다.

두 광고 모두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비주얼을 처리하여 영화에서 흔히 보던 섹스 장면을 익살로 엮어 내면서 성인 동화의 분위기를 물씬 자아낸다. 이 광고의 매력은 바로 이 부분이다. 민담이란 원래 민중 사이에서 창작되고 민중 사이에서 전해진 서사문학이기에 이들 일상사의 희로애락을 승화시켜야 한다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대리만족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경험케 해야 하는 장르인 것이다. 이 광고는 기존의 민담을 허리 아래 쪽으로 끌어내림으로써 원초적인 욕망의 대리 배설을 가능케 한다. 결국 두 이야기는 모두 남녀상열지사인데,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섹스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 아닌가. 이 광고는 “두 남녀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틀에 박힌 이야기의 결말을 “두 남녀는 격렬하게 사랑을 나누었습니다”로 바꿔 놓고 있다. 사실 알고 보니 그랬더군요 식의 너스레를 떤다. 적나라하지만 훨씬 인간적이다.

"밤은 아름다웠고, 별은 빛났습니다. 세헤라자드는 콘돔을 꺼냈습니다"라고 쓰여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이 성인동화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은 “그러했기 때문에 이들의 로맨스는 동화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라는 카피 덕분이다. 마치 변사가 등장하여 전체 상황을 마무리해주는 듯한 이 카피는 성인동화가 잘 익은 공익광고의 틀을 갖추게 하는 모멘트가 된다. 콘돔을 사용했기에 이들 주인공이 죽지 않았고 그래서 이 이야기가 전해 올 수 있었다는 공익성 메시지를 가정법으로 던짐으로써 믿거나 말거나 식의 야사의 성립 근거를 유머러스하게 돌려 댄다.

민담은 욕망을 담은 가정법이다. 일어날 수 없지만 일어나길 바라는 이야기다. 멋진 왕자와 사랑을 나누는 신데렐라가 되고픈,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되고픈 욕망의 구현이다. 광고도 그렇지 않은가? 정우성처럼 고소영처럼 멋지고 폼나는 남녀로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누군들 그 제품을 쓰지 않겠는가. 알면서도 속고, 그렇지만 열광하게 되는 것이 광고다. 그것이 가정법의 마력이다.

김 홍 탁

광고평론가·제일기획 크리에이티브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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