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운교수의 여가클리닉]어른이 만화보면 안되나요?

  • 입력 2002년 4월 4일 14시 37분


Q : 일산의 서동효입니다. 29세이고 회사원입니다. 제겐 주말에 만화 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아직까지 만화책이나 뒤적이느냐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제가 봐도 컴컴한 만화방 한 구석에서 주말을 보내는 사람이 그다지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아요. 나이에 걸맞게 좀 우아하고 품위 있는 여가를 즐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A : 우아하고 품위가 있으면서 재미까지 있는 여가를 원하신다고요? 그런 것이 있다면 제게도 좀 알려주세요. 정말 재미있는 놀이는 폼 나고 우아한 것과는 거리가 멀답니다. 하는 일이 정말 재미있어 죽겠는데 어떻게 옷맵시며 얼굴표정에 신경 쓸 수 있겠어요. 다들 즐거워 정신없이 웃는데 혼자만 우아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보면 좀 가증스럽지 않나요?

혹시 요요마라는 첼리스트의 연주모습을 본 적 있으세요?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은 촛불 켜놓고 포도주 한 잔 들고 즐겨야 하는 우아한 곡입니다. 그런데 정작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에요. 눈은 반쯤 감아 흰자만 살짝 보이고, 고개는 이상한 방식으로 흔들면서 입을 헤 벌리고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우아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몰두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문화적 상황을 고려할 때 컴컴한 만화방에서 만화책에 몰두하는 건장한 20대 청년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때 일본의 젊은 회사원들이 허구한날 만화 따위나 본다고 웃음거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뒤 이들이 만들어 낸 것이 포케몽, 디지몬이에요. 요즘 전 세계의 어린아이들이 디즈니 만화보다도 더 좋아하죠. 이 우스운 만화 캐릭터 상품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우리나라 현대자동차의 몇 배라고 하죠?

동효씨, 만화를 정말 좋아한다면 만화를 단순히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만화에 몰두하여 뭔가를 이뤄내야 합니다. 아마추어 만화비평가가 되는 겁니다. 만화의 문화사적 변화를 추적하고 만화 주인공들의 성격적 특성 등을 조사해서 인터넷 커뮤니티에 만화비평을 올리는 거예요. 오늘날 영화비평가는 많은데 만화비평가는 드뭅니다. 그러나 우아해 보이고 폼나는 언어로 영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한때 컴컴하고 냄새나는 동시상영 전문극장에서 죽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전’으로 일컫는 소설은 읽은 적이 없어도 이현세의 만화는 줄줄이 꿰고 있는 아이들이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되는 날이 옵니다. 그때가 되면 만화는 더 이상 ‘만화 따위’가 아니지요. 그때가 되면 우아한 표정의 동효씨 사진이 만화비평가라는 직함과 더불어 동아일보 WEEKEND 에디션 한 귀퉁이에 실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www.leisure-studi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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