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기자의 현장칼럼]압구정 이색 벼룩시장을 가보니…

  • 입력 2003년 11월 6일 16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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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서울 압구정동 알마마르소 꽃집에서 열린 안나의 바자. 패션 감각이 톡톡 살아있는 중고품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곳이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지난달 31일 서울 압구정동 알마마르소 꽃집에서 열린 안나의 바자. 패션 감각이 톡톡 살아있는 중고품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곳이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얼마 전 패션 칼럼니스트로 일하는 한영아씨(38)로부터 e메일 초청장을 받았다.

미국 뉴욕의 FIT(Fashoi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패션 비즈니스를 전공한 그녀는 패션업계에 종사하는 친구 5명과 함께 4월부터 두 달에 한 번씩 이색적인 벼룩시장을 열고 있다. 그녀의 초청은 다음과 같았다.

‘안나의 바자(Anna’s Bazaar)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저희는 옷이나 패션소품을 접할 기회가 많고 소장한 물건도 많습니다. 그중 사용하지 않는 것들을 모아 벼룩시장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가격이 매우 저렴하며, 친구들이 썼던 것들이어서 위생도 걱정 없습니다. 돌려 쓰는 재미도 있고 재활용의 의미도 좋습니다. 마음 맞는 친구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 또 다른 기쁨입니다.’

●안나의 바자

지난달 31일 그녀들이 벼룩시장 장소로 빌린 서울 압구정동 알마마르소 꽃집을 찾아갔을 때 기분이 좋아졌다. 어쩜 그토록 예쁜 옷과 물건이 많은지.

앤티크 풍의 브로치 1000원, 미국 뉴욕 재빗 컨벤션센터 액세서리쇼에서 사온 아트 시계 3만5000원, 한쪽 어깨가 드러나는 디자인에 러플이 달린 검정색 톱 4000원, 꽃무늬 자수가 놓인 검정 벨벳 지갑 5000원, 노랑 애버크롬비 트레이닝바지 5000원, 미우미우 구두 6만원, 영화 ‘화양연화’ 풍의 중국 상하이 머그컵 1만5000원, 크레이트 앤드 배럴 와인잔 1만원….

이곳의 분위기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대표적 패션거리인 멜로즈 애비뉴의 상점들과 분위기가 흡사하다. 중고품과 부티크 상점, 이국적 골동품점, 아방가르드 화랑들이 가득찬 멜로즈 애비뉴에서는 낡은 스타일의 옷을 재활용하는 거리패션인 빈티지 룩이 늘 패션을 선도한다. 뉴욕 22번가와 23번가 사이의 6번 애비뉴에 있는 앤티크 벼룩시장, 런던 포토벨로의 앤티크 벼룩시장을 연상해도 좋다.

역시 FIT에서 패션광고를 전공하고 현재 패션광고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는 주최 측 황수경씨(31)의 말.

“중고품 시장이 활성화된 미국에서는 도나 카렌 등 세계적 디자이너들이 벼룩시장을 돌며 영감을 얻어요. 그곳은 1960, 70년대 패션의 보고이죠. FIT에는 브루클린 등을 순례하며 쇼핑 노하우를 배우는 ‘벼룩시장 장보기’라는 클래스가 운영될 정도예요.”

한국사회에도 중고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바뀌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생활용품이 주로 나오는 구청 벼룩시장 등에서 패셔너블한 옷과 소품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안나의 바자는 꽤 수준 있는 중고 패션소품을 안심하고 사고 팔 수 있는, 보기 드문 벼룩시장이다.

●중고에 대한 생각들

이날 안나의 바자에는 안무가 홍영주씨를 비롯, 방송 작가와 탤런트, 사회저명인사 딸들도 많이 방문했다. 그들은 무명 브랜드라도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물건을 족집게처럼 골라내고 있었다. 그만큼 패션감각이 있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1만원짜리 푸른색 DKNY 버버리코트와 5만원짜리 구치 구두는 팔리지 않은 데 반해 브랜드 없는 꽃분홍색 4000원짜리 털장갑과 1만5000원짜리 니트는 금세 새 주인을 만났다. 여행용 가방에 자신이 쓰던 물건을 잔뜩 싸 가지고 와 내놓고 그만큼 다른 물건을 사가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엔 꽤 괜찮은 물건들을 1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내놓는 사람들이 신기해 보였다. 어차피 유행은 돌고 도는데 간직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쓸 수 있지 않나 해서.

물건을 고르던 손님 심연진씨(33)는 말한다.

“2, 3년동안 단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은 평생 안 입는다고 봐도 돼요. 필요 없는 물건을 껴안고 있느니 이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내놓고 홀가분해지는 게 낫죠. 내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고요.”

안나의 바자에 모인 사람들은 오래된 것과 나누는 것의 미덕을 아는 듯했다.

물론 값싼 중고 명품만을 찾는다면 다른 곳도 적지 않다. 인근 갤러리아 백화점 건너편에 죽 늘어선 명품 중고숍에는 명품 중독증에 걸린 단골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은 명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연도 모르는 중고품을 사 모은다.

패션 홍보대행사 유스컴 매니저 고란주씨(32)는 말한다.

“친구 또는 친구 어머니가 쓰던 물건들을 이 곳에서 헐값에 사 쓰는데 볼 때마다 흐뭇해져요. 얼마 전 이곳에서 구입한 장미석 장식의 손거울처럼 새 것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풍스러운 멋이 있어요. 벼룩시장을 열면서 발견하는 것은 물건에는 각각 임자가 있다는 거예요.”

●이태원으로…동대문으로…

중고품을 활용한 패션에도 숙지해야 할 것이 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중고품으로 꾸민다고 무조건 감각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세련된 스타일의 진 바지나 재킷에 중고 톱이나 브로치, 클러치백으로 포인트를 주는 것이 좋다.

중고품을 잘 고르기 위해서는 일단 현재의 패션 트렌드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 이에는 스타일 관련 잡지를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안나의 바자를 여는 그녀들은 이태원시장과 동대문시장을 훌륭한 쇼핑 장소로 꼽는다.

압구정동에서 웨딩숍 ‘노제’를 경영하는 황수미씨(35)는 이태원시장의 군인용품 상점에서 구입한 군인용 선글래스와 중고 군용재킷으로 밀리터리 룩을 연출했다. 한영아씨는 이태원시장의 뱀장어 가죽 전문상점에서 오래 전시해 빛이 다 바랜 뱀장어가죽 가방을 1만원에 샀다. 이태원시장은 파티 드레스나 앤티크 주얼리를 사기에도 좋은 곳이다.

고란주씨는 동대문 흥인시장 3층에서 1만원짜리 비키니 수영복과 8000원짜리 나프나프 블루종 재킷을 골라냈고, 황수경씨는 한영아씨 어머니가 10여년 전 사용하던 복고풍 구치 핸드백을 12만원에 사서 들고 다닌다.

가방과 구두를 명품으로 사는 일도 많지만 그것은 브랜드가 아닌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다. 한영아씨는 평범한 디자인보다는 이브 생 로랑이나 펜디처럼 스타일이 있는 브랜드 제품에 손이 간다고 했다.

●재활용-나눔의 미덕

친구들끼리의 모임으로 시작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안나의 바자는 그동안 두 달에 한번씩 열렸고, 앞으로도 그렇게 운영될 계획이란다. 관심 있다면 이 행사를 주최하는 한영아씨(annasbazar@naver.com)에게 연락해 볼 것. 그녀는 이 벼룩시장을 상설화할 구상을 하고 있다. 또는 굳이 이 벼룩시장에 가지 않더라도 가까운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물건의 사연을 공유하며 돌려 쓰는 모임을 연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의 재활용 가능성에 새삼 놀라게 될 것으로 믿는다.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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