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동네]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시인

  • 입력 2001년 11월 27일 10시 33분


얼마전 케이블TV에서 영화 < 넘버3 >(제가 꼽는 한국영화의 명작입니다)가 재방송 하더군요. 영화 끝부분, 그러니까 룸싸롱에서 한일 조폭들의 맞짱씬이 등장하기 전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 스물아홉 섹스는 끝났다 >는 시집을 발표한 이미연이 룸싸롱에서 시선생과 출판사 사장을 접대하는 대목입니다.

이 자리에서 출판사 사장(음악평론가 강헌씨가 출연했습니다)이 이런 요지로 한국 시단을 개탄합니다. “코딱지 같은 나라에서 시인이 3000명이 넘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라구요. 최근 < 장정일의 화두 혹은 코드 > 라는 책에서 시인이자 소설가인 장정일씨가 유독 시가 많이 읽히는 우리의 풍토를 “알 듯 말 듯한 것을 즐기는 문화”라고 정리한 대목이 퍼뜩 떠오르더군요.

신문사에는 일주일에 적게는 5권 많게는 20권이 가까운 시집이 배달됩니다. 소설보다 많은 양입니다. 모두를 기사화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어차피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는데, 어떨 작품은 긴가민가 판단이 명확하게 들지 않을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알 듯 말 듯한 것”을 즐기는 취향이 아닌 탓도 있겠지만, 어떤 작품은 너무 이해가 잘되서, 또 어떤 작품은 너무 이해가 안되서 애를 먹곤 합니다. 시는 소설에 비해 가치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는 사실도 선뜻 시집의 질적 평가를 내리기를 주저하게 만듭니다.

좋은 시란 무엇일까? 그 판단은 결국 개인적인 경험에서 추인할 수 밖에 없겠지요. 고등학교 때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서 느꼈던 감흥, 대학 때 황지우 이성복 정현종 정희승 최승호 최승자 기형도 등을 읽으면서 느꼈던 어떤 떨림 같은 것 말입니다.

하지만 그 때의 기준을 충족하는 시집을 만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기검열이 너무 엄격한 것이 아닌가, 스스로 반성하기도 합니다.

지난주 출판섹션 ‘책의 향기’에서는 모처럼 시집을 문학책 톱으로 올렸습니다. 시집을 크게 소개하기란 아마 반 년만에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반칠환씨의 첫 시집 <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이었습니다. 나름대로 확신이 들었던 이유는, 문학담당 기자 이전에 한 독자로서 시집을 읽고나서 포만감이 들기가 오랜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료 기자들 몇몇을 샘플링해서 읽혀보았는데, 다들 반응이 좋더군요.

이 시집을 읽으면서 특히 좋았던 것은 평이한 언어였습니다. 그리고 삶의 아픔 혹은 세상의 삭막함을 노래하면서도 어둡지 않게 눙칠 수 있는 여유 혹은 혜안이 빛났기 때문입니다. 관념성이 주류를 이루는 요즘 시 풍토에서 심각과 고독의 제스처가 보편적인 것인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또한, 적어도 어떤 독자라도 그의 시집에서는 읽고 나서 작의가 무엇인지 몰라-시쳇말로 ‘필이 꽂히질 않아서’-머리를 긁적일 일은 없습니다. 이런 투명함에 감동의 울림을 넣을 수 있다는 점은 작가의 가장 돋보이는 미덕입니다. 등단 후 10년만간 삭히고 삭혀서 내놓은 첫 시집인 만큼 그 밀도가 어떨 것인지는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시집 중 1부 ‘외딴집’에서는 주로 가족과 고향에 대한 이야기가, 2부 ‘속도에 대한 명상’과 3부 ‘둥근 시집’에서는 세태를 비평한 작품들이 눈에 띱니다.

시집을 묶을 때 감정의 기복선을 따라 작품의 선택과 배치에 좀 더 신경 썼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기는 합니다. 한편으로는 작품의 산문성이 강해서 시의 정통성을 추구하는 비평가들에겐 흠으로 책잡힐만하다고도 여겨집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음미하는 찰진 시맛에 쉽게 매혹된다면 이 정도쯤은 첫 시집의 미숙함 정도로 어여삐 눈감아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벌써부터 반씨의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반씨는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1989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1999년 대산문화재단의 ‘문학인 창작지원’을 받은 촉망받는 시인입니다.

다음 실은 글은 지난 토요일자 ‘책의 향기’에 게재된 졸고입니다. 그리고 [밑줄긋기] 페이지에 시집에서 몇 작품을 골라 전문을 실었습니다.

'밑줄긋기'의 반칠환 시집 전문 보기 ☞

[책의 향기] 가난했지만 따뜻한 유년의 추억 (2001.11.24)

동네 이발관에는 돼지그림이 걸려 있었다. 새끼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어미 젖을 빠는. ‘바리깡’에 머리를 맡기고 그림을 골똘히 보곤했다. ‘희망’이란 글자가 아직도 선연하다.

이런 그림을 ‘키치화(畵)’라고 폼나게 말할 수 있게 된 나이. 돌아보면 ‘이발소 그림’같은 가난한 추억이 우리를 멈추게 만든다. 멈추게 한 그 힘으로 다시 걷을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반칠환씨(37)의 첫 시집을 읽으면서 돼지그림 속의 ‘희망’을 떠올렸다. 촌각을 다투며 사는 우리에게 ‘멈춤’의 힘을 주는 추억에 대하여.

사념(私念)으로 난해한 관념시의 숲에서 그의 언어는 청량해서 도드라진다. 입가를 빙긋이 만들기도 하다가, 눈시울을 뜨듯하게 달구기도 한다. 굳건히 두 발을 땅에 디딘 시인이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충청도 산골 촌놈’ 출신인 반씨는 추억의 편린을 질박한 시어로 찰칵 찍어내 보여준다. ‘내남 없이 주려 넘던 보릿고개였으나 사발입보다도 형제들 목구녕이 턱없이 크게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농사와 묵장사로 집안을 건사한 ‘억척스럽고 총명했던 에미’와 ‘양푼 그득 수제빌’ 먹고 까르르 웃던 감자알 같은 형제들….

가난했으되 따스했던 그의 기억은 도회지 유민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의 곳간이다. 얼굴이 까매진 어머니가 “자식 매꺼놓고 얼굴도 안 비춘다고, 선상님이 속으로 욕하신다”며 물바랜 옥색치마 차려입고 부득부득 학교를 찾을 때의 곤란함이 시인만의 기억일까.

급작스럽게 가정방문한 선생님을 맞으러 열무밭 매다 말고 한달음에 달려오는 어머니의 폼새는 어떻고.

“감물 든 큰성 난닝구에, 고무줄 헐건 몸뻬바지 넥타이 허리띠로 동여매고, 동 방위 받는 시쩨 성 깜장색 훈련화 고쳐신고 달려오시는데 조자룡이 헌창쓰듯 흙 묻은 손엔 호멩이는 왜 들고 나오시나.”(‘가정방문’ 중)

하지만 어린이날 선물로 막걸리를 받아와서 방위병 막내아들에게 “빙그레 웃으며 빈 스뎅그릇 내미시는”(‘어린이날’) 것이 사랑이었음을 안다. 그렇지만 이제 그녀는 “따신물 나오구, 즌깃불 환하지, 테레비 잘 나오지 … 이제 고생 다 끝냈시유”라며 호강을 자랑하지만 “실은 먼산 바라기 (…) 종일 할 일이 없다.”(‘어머니4’ 중)

이제는 추억의 따스함이란 ‘사라진 동화 마을’ 같은 것이지만 시인은 현대의 강팍한 세상을 향해 핏대를 세우지 않는다. ‘억울함이 연료인’ 세상을 걱정하면서도 반어나 역설이 가진 해학을 잃지 않으니.

“삼급수에서 비닐 봉다리 뒤집어쓴 용이 승천하길 바라”는 “불순한 상상”을 금하고 (‘사라진 동화 마을’ 중), “맥도널드 햄버거에 우리밀 빵을 함께 먹은 탓”에 배탈이 들면서도 “세계화 시대에 편협한 국수주의 내장”을 탓한다(‘다국적 똥’ 중).

하지만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시인은 소년처럼 ‘그날’을 고대한다.

“아빠, 그날이 오면/누군가 까만 하늘밭 까맣게 갈아/황금빛 옥수수알 넓게 뿌리고/나는 맨발로 별똥을 주워도 되겠지?”(‘그날이 오면’ 중)

<윤정훈기자> 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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