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손안의 대어 한순간에 놓치다

  • 입력 2002년 3월 31일 17시 30분


이제 ‘승리’라고 쓰인 말뚝만 박으면 타이틀은 그의 것이 된다. 그는 망치를 높게 쳐들었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망치질. 평소처럼 내려 치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의 망치는 마지막 순간 어이없게 빗나가고 만다. 순간 승리의 말뚝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제13기 기성전 도전 5번기 최종국. 기성전 10연패를 노리는 이창호 9단(27)과 정규 기전 첫 우승을 꿈꾸는 목진석 6단(22)이 3월 28일 한국기원 특별대국실에서 마주 앉았다. 이 9단은 지금까지 정규 기전 도전기에서 후배 기사들의 도전을 모두 뿌리쳐 왔다. 만약 목 6단이 이 판을 이겨 타이틀을 따면 한국바둑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

돌을 가리자 이 9단의 흑번. 순간 목 6단의 얼굴엔 실망한 표정이 스친다. 지금까지 둔 도전기 4판이 모두 흑번 필승이었기 때문. 목 6단은 그 징크스를 없애려는 듯 초반부터 거세게 부딪쳐 간다.

오후 1시 점심시간까지 47수. 평소보다 빠른 진행이다. 형세는 팽팽하다.

하지만 오후 대국이 시작되자마자 이 9단이 상변 전투에서 큰 실수를 저질러 목 6단이 한발 앞서 나가기 시작한다. 이 9단의 손길이 한없이 느려진다. 한 수 한 수마다 역전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이 9단은 ‘후배에게 정상의 자리를 내주기에는 아직도 나는 젊다. 여기서 져선 안된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목 6단의 응수는 정확하기만 하다. 이 9단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고 그의 얼굴엔 번뇌의 그림자가 가득해졌다.

목 5단은 상변 흑대마를 몰아가며 중앙과 하변 일대에 거대한 세력을 만들었다. 자, 이제 마지막이다. 초읽기에 몰린 이 9단에 비해 시간도 30분 정도 여유가 있다. 백이 중앙과 하변 세력을 집으로 만드는 말뚝을 박으면 흑이 도저히 덤을 낼 수 없다. 검토실에 모여 있던 기사들도 ‘목기성이 탄생했다’며 검토를 그만 둔 상태.

하지만 마지막 망치질을 하는 목 6단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장면도 백 1은 너무 허술한 수였다. ‘가’에 한발 물러섰으면 백은 큰 집을 지으며 무난히 이길 수 있었다. 이 9단은 초읽기에 몰린 상황에서도 ‘나’와 ‘다’의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며 하변에서 대궐을 짓고 살아버렸다.

258수끝 흑 2집반승. 허망한 승부였다. 42.195㎞를 잘 달려온 마라톤 선수가 결승점을 몇 미터 앞두고 넘어진 꼴이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날려버린 목 6단은 “수고했다”는 기원 관계자의 위로의 말에 웃어보이려고 했지만 그의 얼굴엔 그저 쓴 미소만이 피어났다.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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