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이른 아침 쌀독 여는 소리 들을 때… 소년은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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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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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김애란 지음/356쪽·1만1000원·창비

이 책의 작가는 2002년 등단한 뒤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등 두 권의 소설집으로 한국일보문학상, 오늘의젊은예술가상, 신동엽창작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젊은작가상 등을 휩쓸며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소설가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씨도 “자신의 처지마저 조롱할 수 있는 유머와 풍자가 뛰어나다”며 이 작가에 주목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첫 번째 장편 소설인 이 책은 ‘역시 김애란!’이란 감탄사를 뱉게 만든다. 절망과 슬픔의 심연으로 끝도 없이 추락하며 가슴 울컥하게 만들다가도, 허를 찌르는 반전으로 피식 웃게 만드는, 울리고 웃기는 글쟁이의 재주넘기가 현란하게 펼쳐진다.

작품을 읽는 키워드는 17, 34, 80이란 숫자다. 시골에 살던 열일곱 살 철없는 남녀 고교생이 덜컥 아이를 갖는다. 출산한 아이는 치료약도 없는 조로증(早老症)에 걸렸다. 아이는 열일곱이 됐을 때 이미 서른 넷 부모보다 늙은 여든의 신체 나이를 갖게 되고, 점차 병약해지며 죽음에 다가선다.

어쩌면 단순할 수도 있는, 그저 그런 신파조의 이야기는 냉철한 감정과 상황 묘사, 입에 착착 감기는 대화, 그리고 유머와 반전으로 생기 있게 살아난다. 조로증에 걸린 아름이가 병마와 싸우면서 또래보다 훌쩍 성숙해져 내뱉는 말들은 기특하면서도 가슴 아프다.

아름이는 TV 기부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면서 작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디션에 제 또래 애들이 오십만 명이 넘게 응시했대요. 뭔가 되고 싶어 하는 애들이 그렇게 많다는 데 좀 놀랐어요.…제 눈에 자꾸 걸렸던 건 거기서 떨어진 친구들이었어요. 결과를 알고 시험장 문을 열고 나오는데, 대부분 울음을 터뜨리며 부모 품에 안기더라고요.…그 느낌이 정말 궁금했어요. 저는 뭔가 실패할 기회조차 없었거든요.”

소설가 김애란 씨는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늙는다’는 것과 ‘산다’는 것에 대한 사색을 눈물과 웃음으로 버무려냈다. 창비 제공
소설가 김애란 씨는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늙는다’는 것과 ‘산다’는 것에 대한 사색을 눈물과 웃음으로 버무려냈다. 창비 제공
‘언제 살고 싶은 생각이 드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한다. 엄마가 이른 아침 쌀독을 여는 소리를 들을 때, 오락 프로그램에서 좋아하는 연예인이 재치 있는 애드리브를 던질 때, 상투적인 멜로영화 예고편을 볼 때, 학교 운동장에 남은 축구화 자국을 볼 때 등이라고.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스쳐가는 일상의 편린 하나하나가 누군가에는 너무도 소중하다는 작은 깨달음을 가슴 먹먹하게 읊조리는 듯하다.

작품은 툭툭 터지는 웃음과 기발한 장면으로 무겁게 가라앉지 않아 현실감을 획득한다. 나이키 매장을 열었다 실패하자 온 가족이 체육복만 입고 지내 ‘태릉선수촌이 됐다’든가, 기부 프로그램에 나가게 된 아름이 가족이 전날 마스크 팩을 하다가 ‘정작 방송에서 초췌해 보이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장면 등이다.

엄마는 둘째를 임신하고, 아름이는 팔다리가 가늘어지고 눈까지 멀어 죽음의 기운이 짙게 그늘진다. 그런 아름이는 엄마 배를 만지며 조곤조곤 말한다.

“엄마, 언젠가 이 아이가 태어나면 제 머리에 형 손바닥이 한 번 올라온 적이 있었다고 말해주세요.”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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