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의 경쟁력]<25>CF감독 용이의 ‘일기장’

  • 입력 2009년 3월 1일 08시 06분


감독 용이 1974년생 1999년 CF감독 데뷔 현재 CF프로덕션 도널드시럽 대표.
감독 용이 1974년생 1999년 CF감독 데뷔 현재 CF프로덕션 도널드시럽 대표.
최근 한 보험사 CF에 모델로 출연한 감독 용이
최근 한 보험사 CF에 모델로 출연한 감독 용이
감독 용이는 트렌드를 이끄는 CF감독이 되기 위해선 남들과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고 믿는다.
감독 용이는 트렌드를 이끄는 CF감독이 되기 위해선 남들과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고 믿는다.
"철수/ 영희/ 바둑이, 액체/ 고체/ 기체… 세상은 모두 세 가지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래서 토크, 플레이 러브…."

온갖 패러디를 낳으며 주목을 받았던 애니콜 광고 '인생의 3요소' 히트작, 그 이후 TV를 통해 폭격하듯 쏟아졌던 전지현의 애니콜 광고, 2007년 영상과 사진 텍스트를 종합한 웹(Web)의 역동성을 잘 표현해 블로거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던 네이버 블로그 시즌 2 광고.

이 광고들의 이미지는 용이 감독(35)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그는 최근 광고업계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CF 감독이다. 90년대 후반 '영상천재'로 불리며 만 25살에 CF감독으로 입봉했던 그는 최근에만 해도 최고의 광고주로 꼽히는 삼성전자 애니콜, NHN의 네이버, 동아제약의 박카스 광고 등을 제작했다. 현재는 독립 CF프로덕션인 '도널드 시럽' 대표로 일하고 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배두나가 주연한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2003)의 감독으로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는 장편영화는 물론 뮤직비디오, 영화 예고편 등 모든 영상 분야를 아우르는 전천후 플레이어다. 아예 자신이 직접 CF와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영화 '올드 보이'에서 감금된 최민식에게 군만두를 배달하는 중국집 배달원이 그다.

또 EBS의 애니메이션 소개 프로그램 '애니토피아', SBS '접속! 무비월드'의 진행자로도 활약했고 최근엔 한 보험사 광고에 등장해 "평생 같은 일만 하면 재미없다"며 "10년 뒤에는 감독이 아니라 요리사를 해보고 싶다"고 외친다. 게다가 수년간 최정상급 여성 연예인과 뜨거운 로맨스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이미지로 사고해온 영상세대들이 열광할만한 배경은 다 갖춘 셈이다.


▲동아닷컴 정주희 기자

●"좋은 광고란 치열한 협상의 결과"

좋은 CF감독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용 감독은 무엇보다 "협상과 타협의 기술"을 꼽았다. 30초짜리 광고 한 편을 만들려면 수십 시간의 촬영과 수백 명의 관계자가 수천시간의 기획을 거쳐야 하는 고난의 행군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보다 광고의 최종결정권은 CF 감독이 아니라 광고주에게 절대적으로 집중돼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광고 제작의 고충을 그는 '주방에 들어온 손님'으로 표현했다.

"식당에 들어온 손님은 보통 고기냐 생선이냐, 웰던이냐 미디엄 레어냐만 결정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광고는 손님이 주방에 들어와 요리사에게 '지금 고기 뒤집을 때야'하고 지시하는 형국이죠. 뭔가 창의적인 시도를 하고 싶은 감독에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제약이 뒤따른다는 이야기예요."

광고는 예술적 감수성만으로 이뤄지지 않으므로 극도로 세심한 배려와 인내심이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광고는 기업 홍보활동의 으뜸이잖아요. 좋은 광고 하나가 사업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얼마나 기업들이 치열하게 고민하겠어요. 누구나 잘해보고 싶으니 의견이 충돌할 수밖에 없죠. 그런 모든 제약을 딛고 타협점을 이끌어 내는 것이 바로 감독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 같은 협상과 타협의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세상을 놀래킬 감독의 창의력이다. 첨단 제품을 소개하는 광고는 새로운 트렌드 그 자체라 할 수 있고 남들보다 한발 앞선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하면 경쟁이 치열한 이 바닥에선 버티기 어렵다.

때문에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평범해 지는 것'이다. 눈에 차지 않는 디자인은 절대 곁에 들이지도 않고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 늘 관찰하고 기록한다.

"절대적으로 세심한 관찰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눈으로 기억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까 무조건 적어두는 거죠."

● "어릴 적부터 써온 일기장이 내 창의력의 원천"

그가 꼽는 자신만의 성공 비결은 바로 30년 가까이 써오고 있는 일기다. 그는 지독한 메모광이다.

"감독으로 데뷔하던 20대 중반에 이미 일기장 수십 권을 갖고 있었어요. 라면을 개봉했는데 다시마가 세 개 나왔다는 둥 소소한 것부터 스크린 쿼터 같은 심각한 얘기까지 거의 모든 것을 기록합니다."

이 같은 그의 일기장은 실제 작품에서 이미지나 대사로 구현되기도 한다. 로 구현되거나, 또는 실제 영화에서도 대사로 구현되기도 한다. 영화 '열세 살 수아'(2007)'에서 "핸드폰에 저장된 196개의 전화번호 가운데 전화할 곳이 한 곳도 없다"는 대사는 그의 일기장에서 따온 것.

지금도 촬영이 끝나면 그는 자신만의 비밀 일기장에 함께 작업한 사람에 대한 인상 평을 비롯해 광고에 쓰인 대사의 발음을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지까지 시시콜콜하게 전부 기록한다.

그는 CF를 통해 익힌 영상감각을 뮤직비디오와 영화예고편 분야로도 확대 적용했다. 1998년 강산에의 뮤직비디오 '거꾸로 강물을 거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을 연출했고 이후 한국 대표가수들의 작품을 연출해 호평을 받았다. 우리가 극장에서 본 영화 예고편의 상당수도 그가 만든 것이다.

"영화 예고편을 만들려면 촬영 소스를 검토하게 되잖아요. 자연스럽게 한국영화의 거장들이 어떻게 촬영하고 찍었는지를 공부하는 기회가 되더군요. 물론 그런 것 하나하나 세심하게 기록해서 제가 감독을 하면 써먹으려고 노력했죠."

그의 영화감독 데뷔 첫 작품인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는 평단으로부터 극단적인 평가를 받았다. CF 출신 감독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CF 감독 출신이라 예쁜 화면에 강하지만…이러저러한 한계가 있다"는 식의 비판이 쏟아졌다.

"그 이전까지는 승승장구 하다보니 건방졌다고 할까요. 그런데 영화감독을 해보니 제 장점과 한계가 동시에 보였어요. 그럼에도 제 영화를 보고 행복해 하는 분이 많아 저도 덩달아 행복해 졌습니다. "

실제 미국 독립영화의 기수인 스파이크 리, 독일 예술영화의 거장인 빔 벤더스 역시 광고감독과 영화감독을 동시에 하고 있다. 그리고 국내 영화감독들 역시 광고감독 제의를 거절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감독의 재량권에 있어 영화감독이 CF보다 월등하게 많더군요. 그 점이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CF감독에서 영화감독으로 확장해 가는 것은 가능해도 그 반대는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웃음)"

그는 자신의 작업 대상이 영상일 뿐 CF나 영화 등 특정 분야에 한정돼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그저 '감독 용이'로 불리길 원한다.

"얼마 전에 우연히 10년 전 일기를 찾았어요. 그때 동창생들 끼리 미래에 하고 싶은 일을 적어 놓은 대목이 있었는데요. 저는 잊고 있었는데 '영화감독'이라고 적어 놨더라고요. 최근에 만난 예전 짝사랑 상대도 그걸 기억하고 있는지 '꿈을 이뤄서 행복하겠다'고 말하더군요. 사실 이제 시작이기 때문에 앞으로 제가 어떻게 제 꿈을 이뤄 가는지 지켜봐 주셨으면 합니다."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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