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곬]커피회사 20년 다니다 커피점 낸 허형만씨

  • 입력 2002년 10월 13일 18시 03분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내건 커피점을 연 허형만씨가 3000그루에 한 그루만 나온다며 애지중지 키우는 희귀종 커피나무 앞에서 자신이 만든 ‘카페라테’를 맛보고 있다. 허씨는 커피나무 잎에서는 커피향이 나지 않는데 손님들은 예외없이 향을 맡고 간다며 미소를 지었다.-김경제기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내건 커피점을 연 허형만씨가 3000그루에 한 그루만 나온다며 애지중지 키우는 희귀종 커피나무 앞에서 자신이 만든 ‘카페라테’를 맛보고 있다. 허씨는 커피나무 잎에서는 커피향이 나지 않는데 손님들은 예외없이 향을 맡고 간다며 미소를 지었다.-김경제기자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에 가면 이름 석자를 내건 간판을 많이 볼 수 있다. 주로 성형외과나 패션디자이너들의 이름이다. 하지만 커피점에도 이름 석자가 붙어있다면? ‘허형만의 압구정 커피점’. 만화가 허영만이 커피점을 냈나? 자세히 보면 허영만이 아니라 허형만이다.

누굴까 하는 호기심에 커피점 앞을 기웃거리다 보면 향긋한 커피향에 발이 스스로 알아서 문턱을 넘어서고 만다. 아차 싶은 순간 ‘어서 오세요’하고 환하게 눈웃음짓는 사내. 국내 커피 마니아들에겐 자신의 고향인 경남 고성의 한 마을 이름을 딴 ‘중촌(中村)사람’이란 별호로 더 유명한 허형만(許衡萬·45)씨다. 넓은 이마에 금테안경, 빈틈없어 보이는 눈빛의 이 사내에겐 회사 중역쯤이 더 어울려 보인다.

사실 그는 지난해까지 커피회사 중역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커피업체에 발을 디딘 뒤 20년 가까이 커피의 수입, 제품개발, 판매, 유통까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이다. 심지어 생일마저 커피데이(10월1일)와 같다나. 그런 그가 8평 규모의 작은 커피점을 낸 것은 누구나 좋아하는 커피가 아니라 저마다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는 문화에 대한 꿈 때문이었다.

“한국의 원두커피 대 인스턴트 커피의 소비율이 20년째 10 대 90입니다.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선 정반대죠. 보통 1인당 GNP 1만3000달러를 기준으로 이 비율의 역전현상이 일어난다는 데 한국은 20년째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어요.”

그의 꿈은 커피점을 찾아와서 ‘어떤 커피가 제일 맛있느냐’는 멋대가리 없는 질문을 던지기보단 ‘저는 단 맛은 싫으니 설탕은 조금만 넣어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문화다. 또 거액의 광고료를 쏟아붓는 인스턴트 커피맛에 ‘인생의 맛’ 운운하는 것을 탈피하는 일이요, 스타벅스 같은 문화적 포장의 겉멋을 걷어낼 줄 아는 주체를 찾는 것이다.

“사람이 기호품을 즐겨야지 기호품이 사람을 선택해서야 되겠습니까. 다만 기호품을 즐길 때는 제대로 즐겨야죠. 남의 즐거움을 빌릴 순 없지 않겠습니까.”

커피를 제대로 즐기는 첫걸음은 뭘까. 그는 진짜 커피 맛을 아는 것부터라고 했다. 소위 맛의 3박자를 갖춘 커피 즉, 600m 이상 고산지대에서 재배한 아라비카 종(種)의 신선한 원두(green bean), 이 원두를 검붉은 빛깔로 볶아내는 기술(roasting), 이를 갈아낸 커피가루의 20%만 정확히 우려내는 기술(brewing)이 어우러진 커피다.

허씨는 이 3박자가 어떻게 어울리느냐에 따라 맛이 변하는 것을 손님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친다. 아니 체험하게 한다. 단골손님끼리 ‘생체실험좌석’이라고 부르는 커피 바 앞좌석에 앉는 순간 당신은 적어도 대여섯 잔의 커피는 맛볼 각오를 해야 한다.

포병장교 출신인 그는 자기 입맛을 찾는 일을 지도상의 좌표 찾기에 비유한다.

“목표를 정확히 설정하려면 우선 자기 위치가 지도상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죠. 자기 좌표가 정확하지 않으면 목표의 좌표도 흔들리니까요.”

그는 자기 입맛을 찾는 데만 15년이 걸렸다고 했다. 결국 커피를 즐기는 작은 일 하나에도 자아를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좌표설정이 끝나면 ‘열역학(roasting)’과 ‘유체역학(brewing)’을 배워야 한다. 실제로 그는 손님에게 커피만 파는 것이 아니다. 매주 수요일 7주 과정의 커피강좌를 열어 지금까지 250여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커피가 가장 맛있을 때는 첫맛은 쓰고, 그 다음 입안에 침이 도는 신맛이 받쳐주고, 다 마시고 나면 향긋한 단맛이 남습니다. 좋은 인생도 그렇잖아요. 쓴맛도 보고 신맛도 보지만 마지막엔 고진감래를 맛보는 삶. 그래서 커피의 맛이 오묘하다는 겁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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