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joy]붉게 물든 청송 주왕산

  • Array
  • 입력 2012년 11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솔바람 솔솔 불더니 단풍꽃이 화르르

붉게 물든 주왕산 학소대(왼쪽)와 병풍바위. 옛날 학소대 꼭대기에 청학과 백학 한 쌍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포수가 백학을 쏘아 잡은 뒤, 홀로 남은 청학이 날마다 구슬피 울면서 그 주위를 맴돌았다고 한다. 주왕산 단풍은 이번 주말에 절정을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 ‘푸른 솔 고을’ 청송은 요즘 산도 붉고, 시냇물도 붉고, 사과밭도 붉고, 사람들 마음도 붉다. 주왕산=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붉게 물든 주왕산 학소대(왼쪽)와 병풍바위. 옛날 학소대 꼭대기에 청학과 백학 한 쌍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포수가 백학을 쏘아 잡은 뒤, 홀로 남은 청학이 날마다 구슬피 울면서 그 주위를 맴돌았다고 한다. 주왕산 단풍은 이번 주말에 절정을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 ‘푸른 솔 고을’ 청송은 요즘 산도 붉고, 시냇물도 붉고, 사과밭도 붉고, 사람들 마음도 붉다. 주왕산=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청송(靑松)은 ‘늘 푸른 솔’이다. 사방이 크고 작은 산이다. 재를 넘고 물을 건너야 비로소 닿을 수 있다. 깊은 숲과 맑은 물이 청아하다. 소나무 가지에 학이 앉아있는 듯한 느낌. 느릿느릿 시간이 멈춘 고을. 단순하고 소박한 사람들. 지금도 옛날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역시 ‘경북의 3대 오지 BYC(봉화·영양·청송)’란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늙은 가을. 주왕산(해발 720m)에 불이 붙었다. 여기저기 발그레 달아올랐다. 산자락 사과밭은 아예 활활 타오르고 있다.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알들이 새악시 볼처럼 발갛다. 주왕산은 바위산이다.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돌산’이다. 우뚝우뚝 암벽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그 암벽 사이로 맑은 물이 요리조리 흐른다. 붉은 나뭇잎배가 떼 지어 떠다닌다. 거무죽죽한 바위머리에 빨간 단풍꽃이 다발로 피었다. 쪽빛 하늘이 삐죽삐죽 암벽 틈새로 얼굴을 내민다.

주왕산 오르는 길은 산책길이다. 아이들과 손잡고 걷는 길이다. 어르신들이 뒷짐 지고 슬슬 걸어도 3시간이면 너끈하다. 주방계곡코스(대전사∼주왕암∼망월대∼학소대∼제1폭포∼제3폭포)는 왕복 7km쯤 된다. 울긋불긋 등산복 차림의 사람꽃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요즘 휴일엔 하루 3만∼5만 명이 붐빈다. 가만히 있어도 등 떠밀려 간다. 서둘러 새벽안개 피어오를 때 오르는 게 좋다.

왜 주왕산인가. 중국 당나라 때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쫓겨 온 ‘주왕의 전설’이 서려서 그렇다. 결국 그는 당의 요청으로 징벌에 나선 신라 마장군의 화살에 쓰러졌다 한다. 주왕이 쌓았다는 산성, 그가 최후를 맞은 주왕굴, 그가 깃발을 꽂았다는 기암(旗巖) 등 곳곳에 전설의 흔적은 많다.

주왕은 왜 하필 이곳까지 왔을까. 고개가 갸웃해진다. 차라리 785년 신라 선덕여왕이 죽은 뒤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김주원(金周元)이 이곳에 대궐을 짓고 은신했다는 전설에 솔깃해진다. 김주원은 당시 ‘명주(강릉)근왕’으로 임명돼 경주권력으로부터 멀어졌다. 오늘날 강릉 김씨 시조가 김주원이다.

주산지는 농사짓는 데 쓸 물을 가둬놓은 아담한 저수지이다. 길이 200m, 너비 100m, 수심 8m. 둘러보는 데 20분도 채 안 걸린다. 요즘 물이 적어 영 볼품이 없다. 150여 년 된 왕버들 23그루가 시름시름 앓고 있다. 이미 죽은 나무가 덩그마니 거무스레한 마른 육신을 바람에 말리고 있다. 저수지 주위 단풍이 유난히 곱다.

청송은 돌이 좋다. 꽃돌이 나는 곳은 이곳뿐이다. 돌 속에서 온갖 꽃이 화르르 핀다. 국화 모란 장미 해바라기…. 청송사기도 그렇다. 돌을 빻아 얇고 가벼운 사발, 접시 등을 만든다. 그런 돌은 청송밖에 없다. 청송백자 기능 보유자인 고만경 옹(83)은 “요즘엔 돌을 기계로 갈지만, 옛날엔 디딜방아로 하나하나 빻았다. 이젠 좋은 돌이 많지 않아 색깔이 눈처럼 희게 나오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소나무는 죽어 백자 가마에 불을 지핀다. 솔솔 이는 불땀이 맛있다. 부윰한 돌그릇들이 가마에서 솔솔 영근다.

‘소나무의 이름은/솔이야/그래서 솔밭에/바람이 솔솔 불면/저도 솔솔하고/대답하며/저렇게 흔드는 거야’ ―이문구 ‘소나무’전문
담벼락엔 왜 구멍을 뚫었을까
○ 청송 심씨 99칸 고택


청송 심씨 99칸 한옥 송소고택.
청송 심씨 99칸 한옥 송소고택.
청송 심씨(沈氏)는 조선시대 명문가다. 문과급제자 224명, 정승 13명을 배출했다. 심덕부(1328∼1401)와 그의 아들 심온(1375?∼1418), 손자 심회(1418∼1493)는 3대가 대대로 정승에 오를 정도였다. 조선시대 3대가 정승에 오른 집안은 청송 심씨, 달성 서씨, 청풍 김씨뿐이다.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1395∼1446)도 청송 심씨 심온의 맏딸이다. 13세 때 두 살 아래인 당시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대군(1397∼1450)과 혼인했다. 1418년 충녕이 왕이 되면서 졸지에 공비(恭妃)에 올랐다. 하지만 외척을 끔찍이 싫어했던 상왕 태종 이방원(1367∼1422)은 그의 친정아버지 심온을 역적으로 몰아 죽여 버렸다. 친정어머니 안씨는 지방의 관노로 보내졌다(후에 회복). 당시 명색이 왕이었던 세종은 아버지 서슬에 아무소리도 못했다. 결국 소헌왕후는 자신이 왕비가 되는 대신, 친정이 풍비박산 났다. 소헌왕후가 정식 ‘왕비’로 불리게 된 것도 세종 14년(1432년)에 이르러서였다.

송소고택은 1880년께 송소(松韶) 심호택이 지은 99칸 한옥집이다. 심호택은 개국공신 심덕부의 동생 심원부의 후손이다. 고려관리였던 심원부는 형과는 달리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의 후손들도 한양을 등지고 청송에서 흩어져 600년 가까이 뿌리내리고 살았다. 이들은 9대에 걸쳐 250여 년 동안 만석꾼 소리를 들었다. 광복 이전까지만 해도 ‘청송에서 대구까지 가려면 심부자 땅 밟지 않고는 못 간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12대 만석꾼 경주 최부자와 함께 영남의 대부호로 손꼽혔다.

송소고택은 대지 약 8300m²(약 2500평)에 7동 99칸 집이다. 솟을대문에 행랑채(문간채), 주인장이 머물렀던 큰 사랑채, 큰아들이 거주했던 작은 사랑채, 아녀자들의 ‘ㅁ’자형 안채와 별채가 있고 방앗간, 곳간이 딸려 있다. 집마다 크고 작은 마당이 별도로 있다. 송소고택은 강릉 선교장, 보은 선병국가옥과 함께 조선의 3대 99칸 집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엔 ‘ㄱ’자형 헛담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그 대신 담벼락엔 구멍이 뚫려 있다. 사랑채 쪽에선 분명 구멍이 6개인데, 안채 쪽에선 3개뿐이다. 사랑채의 2개 구멍이 안채 쪽 1개 구멍에 45도 각도로 비스듬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채에서는 아무리 그 구멍을 들여다보아도 안채가 보이지 않는다. 안채에서 사랑채 손님이 몇이나 왔는지 살펴보는 용도로 쓰였다.

장주 심재오 씨(57)는 “구한말 고종아들 의친왕, 이범석 장군, 조병옥 박사 등이 이곳에서 묵어갔으며, 독립운동가 오세창 선생(1864∼1953)은 ‘松韶古莊(송소고장)’이라는 현판까지 써 주셨는데 누가 떼어가 버렸다. 옛 고문집도 산처럼 쌓여있었는데 전문도둑들이 수십 번에 걸쳐 싹쓸이해 갔다. 아무리 숨겨도 귀신같이 찾아내는 데야 도리가 없었다”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송소고택엔 현판 글씨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하기야 신발 놓는 댓돌까지 빼 갔다니 할말이 없다. 그래도 옛 흔적은 많다. 수많은 사람의 발길로 닳고 닳은 문지방, 연꽃 모란 등 다양한 문짝문양, 쓰다 남은 기와로 무늬를 넣은 디새죽담이 정갈하다. 후원의 대숲에선 맑은 바람이 분다. 집 앞 개울가에서 피어오르는 아침 물안개도 황홀하다. 검은 삽살개가 꼬리를 치며 반긴다. 송소고택에선 숙박체험이 가능하다. 주변엔 찰방공파종택, 송정고택, 창실고택, 새덕사, 벽절정, 소류정, 학산정, 경의재, 요동재사 등 볼만한 옛 건물이 많다.
▼작가 김주영이 감꽃 주워 먹고 소설 객주가 태어난 땅 ‘청송’▼


소설 ‘객주’의 작가 김주영(73·사진)은 청송이 고향이다. 그는 청송 진보장터 근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너무 배가 고파 떨어진 감꽃을 주워 먹으며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 없이 홀로 3남매를 어찌어찌 키웠다.

“진보초등학교 6년 동안 교과서 없이 다녔고, 점심 도시락 한 번 못 싸가고, 학비 한 번 못 냈다. 미술시간엔 크레파스가 없었다. 친구에게 통사정해 빌릴 수 있는 건, 거의 쓰지 않는 흰색크레파스뿐이었다. 산을 흰색으로 칠해서 제출하면 선생님께서 부르셨다. 귀를 잡아당기며 산이 보이는 창가로 데려 갔다. ‘저게 무슨 색깔이냐?’….”

그의 어머니는 천하태평이었다. 오늘 당장 끼니가 떨어져도 걱정하지 않았다. 운동회 날에는 아들에게 달리기 경주할 때 뛰지 말라고 코치했다. ‘넌 먹은 게 없어서, 달리다가 넘어지면 두 번 다시 못 일어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어린 김주영은 ‘그때 언제 어느 때라도 천천히 걷는 배짱을 갖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진보는 영덕 해안과 청송 영양 안동의 내륙을 오가는 물산의 길목이다. 장이 크게 설 수밖에 없었다. 김주영은 그런 시끌벅적한 장바닥에서 온갖 인간 군상들을 볼 수 있었다. 서민들의 웃음과 눈물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남사당패거리들의 한마당 놀음이 있었고 곡마단이 있었다.

“장터는 삶이 발가벗어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치열하고 거리낌 없는 장소였다. 상놈들의 고달픔과 기쁨이 항상 함께 있었다. 한국의 서민적 애환이 질금질금 눈물을 뿌리며 헤어지고 만난 장소였다.”

그는 5년간 사료 수집, 3년간 장터 순례, 200여 명의 증인 취재 등 끈질긴 발품 끝에 소설 ‘객주’를 내놓았다. 올 100년을 맞은 그의 모교 진보초등학교 교정엔 ‘김주영문학비’가 자랑스럽게 서 있다.
▼9일부터 청송 사과 축제▼


청송은 사과의 고장이다. 꿀사과로 자타가 인정할 정도로 이름났다. 일교차가 심하고 일조량이 풍부해 당도가 높다. 재배면적은 2514ha로 전국 생산량의 7%에 불과하다. 경북에서도 재배면적이 안동(2914ha), 영주(2631ha)에 이은 세 번째.

하지만 맛이나 명성으로는 전국 으뜸이다. 2010년 농림수산식품부 농식품 파워브랜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청송에선 해마다 사과축제가 열린다. 올해는 11월 9일부터 11일까지 사흘간 펼쳐진다. 매년 10월에 열렸던 것이 올핸 1∼2주 늦춰졌다. 요즘 청송 사과밭엔 후지사과가 주렁주렁 발그레 익고 있다(사진). 다채로운 공연과 다양한 사과이벤트도 펼쳐진다. 054-873-0101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