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축구이야기]골대만 3번 맞힌 ‘신의 장난’

  • 입력 2002년 6월 1일 01시 13분


축구의 신은 인간의 오만을 용서하지 않았다. 신은 ‘바벨탑의 신화’를 꿈꾸는 제국 프랑스를 희롱하기 위해 세네갈을 선택했다.

월드컵 1호 골이 터지는 순간, 기우뚱하면서 지구의 자전축이 확실히 기울어졌다. 관중들은 현기증을 느낄 틈조차 없었다. 만약 관중의 심박수를 집단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계가 있었다면 그 순간 고장나고 말았을 것이다.

운명의 대결이었다. 프랑스와 세네갈, 유럽 제국의 상징적인 나라와 식민지 아프리카의 대표성을 띤 세네갈. 그들처럼 지배와 식민의 슬픈 역사를 지닌 한일 양국이 공동 개최하는 역사적인 월드컵의 첫 경기에서 양국 선수들은 또 한번 혈전을 치렀다.

그러나 그들이 푸른 잔디 위에서 치른 혈전은 인류가 겪은 그 어떤 대립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 인류는 그동안 민족 인종 종교 사상의 서로 다름을 앞세워 그야말로 무자비한 대립을 해왔으며 여전히 화약냄새는 지구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양국 선수들이 치른 이번 혈전은 더 이상 갈등과 대립의 폭력은 아니었다. 그들은 총칼을 잠시 잊고 축구화를 신었으며 폭탄 대신 공을 찼다. 심판과 관중은 역사의 늠름한 증인으로서 제 몫을 충분히 했다. 규칙은 엄정했고 환호성은 밤하늘을 메웠다.

그리고 경기 결과는 인류의 지난 역사를 비웃었다.이변의 주인공이 된 양국 선수들은 앞으로 한 달 동안 60억 인류를 열병에 시달리게 할 킥오프 휘슬이 울리자마자 지난날의 애증을 모조리 잊었다. 오직 축구공에 집중했으며 경기장의 온도는 순식간에 급상승했다.

세네갈에서 태어나 일찍 프랑스로 건너와 예술 축구의 허리를 책임진 파트리크 비에라는 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느낌이 남다르다. 그러나 감상에 젖어 공을 차지는 않겠다.”

그는 자신의 말을 지켰지만 원하던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신이 점지한 이변의 주인공 토니 실바는 막강 화력 프랑스를 가볍게 막아냈다. 놀라운 탄력과 공간 장악력을 선보이며 저 멀리 마주선 유럽 최고의 골키퍼 바르테즈를 압도했다. 그리고 엘 하지 디우프는 우리와 같은 유전자를 가지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드사이를 주축으로 하는 철의 포백라인은 고무공처럼 튀어오르는 이 아프리카 전사의 움직임 앞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마침내 종료 휘슬이 울렸다.

더 이상 뛸 이유가 없게되자 프랑스 선수들은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완전히 연소하지 못한 허탈감을 이기지 못하고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그들에게 라커룸은 너무 멀어 보였다. 탈진 직전까지 이른 세네갈 선수들은 분기탱천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개막 행사용으로 나눠준 우리 소고와 아프리카 타악기가 빚어내는 역동적이면서도 기이한 소음에 맞춰 세네갈 선수들은 옛 초원의 전사들처럼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렇게 신의 유희는 끝났다. 골대를 세 번이나 맞히는 장난까지 신은 즐겼다.

그러나 이제 겨우 한 경기가 끝났을 뿐 신은 또 어떻게 인간의 오만을 희롱할 것인가. 앞으로 한 달 동안 예기치 못한 신의 장난과 운명의 힘에 맞서 싸울 선수들의 거친 호흡이 기대된다.

축구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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