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칼럼]홍명보를 우습게 보지 말라

  • 입력 2001년 12월 17일 16시 53분


홍명보라는 이름은 참으로 오랫동안 우리 대표팀을 지배했다는 생각이 든다. 1990년 월드컵을 계기로 혜성 같이 등장한 이 선수는 한국 대표팀의 아이콘이며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 동양의 베켄바우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월드컵 3회 출전을 비롯하여 각종 세계 올스타 대회에 출전하기도 하였으며 FIFA 내에서는 현역 선수들을 대표하는 위원회에도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팬들의 사랑과 믿음은 다른 어떤 선수가 받은 것 보다도 절대적이었다. 그의 대표팀 동기생인 황선홍이 화려한 공격수의 타이틀과 최고 수준의 기량에도 불구하고 무수히 많은 린치를 당한 것과 달리, 홍명보라는 이름은 지난 10년 동안 별다른 흠집 없이 ‘최고’라는 찬사를 한 몸에 받아왔다. 아마도 앞으로 2년 남짓한 그의 축구 인생 또한 그렇게 명예롭고 화려하게 막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부상을 당하면서 대표팀에서 잠시 떠나 있는 동안 그의 확고부동한 아성이 조금씩 침식 당하고 있다. 최고의 스위퍼인 반면에 스피드와 체력, 힘, 대인마크 능력 등을 요구하는 전통적인 수비수로서의 한계를 지적 받았으며 새로운 사령탑과 새로운 수비 시스템은 과거처럼 홍명보 위주의 팀 구성을 탈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신예 송종국을 비롯한 유상철이나 최진철 등의 파워풀한 수비수들이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한국수비=홍명보’라는 공식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홍명보 딜레마’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권불십년’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면서 홍명보 시대가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의견을 보이기도 한다.

홍명보의 위상과 역할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또한 시간이 흐르고 변화가 빠른 만큼 그러한 결과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오히려 그 동안 홍명보 말고는 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던 우리 축구는 그 동안 너무 나태했는지도 모른다. 변화를 두려워 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도 없을 것이다. 황선홍에게는 그토록 가혹한 린치를 가하면서도 유독 홍명보에게는 지나치게 후한 대접을 했다는 비아냥을 들을 수도 있을 거고…

과연 홍명보의 가치, 그리고 그의 위상은 이제 막을 내리는 것일까? 한국 축구는 정말로 홍명보라는 그늘을 벗어 던지고, 그가 없는 수비라인으로 더욱 탄탄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제 그의 10년 아성도 시들해질 때가 된 것인가? 최근의 몇 차례 평가전에서 분명히 홍명보는 없었다. 반면에 그 동안 고질적인 약점을 노출했던 수비라인이 전에 없이 탄탄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어라? 홍명보 없이도 잘 되네?’ 하는 반응이 나오게 되었고, 심지어는 ‘홍명보가 없으니 더 잘되네?’ 라는 평가를 내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홍명보의 존재를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월드컵 본선이 아니던가? 월드컵 3회 출전에 A 매치 100경기 이상 출전 기록을 가졌으며 현재의 기량에서도 손색이 없는 현역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이 바로 홍명보다. 수비수라는 핸디캡을 가지고도 한국 팀에서는 유일하게 월드컵에서 2득점을 올린 선수이기도 하다. 아마 월드컵에 출전하는 다른 나라들이라면 이런 선수를 엄청나게 탐내고 있을 것이다. 특히, 강력한 카리스마와 게임 감각으로 팀을 진두지휘하는 야전 사령관 역할까지 하는 선수라는 점이 매력적일 것이다. 세상 어느 감독이 이런 선수를 가지고 싶지 않겠는가?

여담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월드컵 첫 경기 상대인 폴란드를 아주 만만하게 생각한다. 월드컵 출전 경험을 가진 선수가 단 한명도 없으며, 우리의 홈 개막 경기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량이 이러한 핸디캡을 극복할 만큼 우리를 압도한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감히 폴란드를 껌으로 취급하려는 것이다. 거기에 비한다면 우리 팀은 두 가지의 확연한 장점을 가진다. 첫째는 개최국으로서 홈 경기를 치른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홍명보 황선홍 유상철과 같이 월드컵 출전 경험과 득점 경험을 갖춘 선수들을 공격-미드필드-수비에 걸쳐서 보유했으며 감독 또한 월드컵 4강에 오른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경험이라는 것, 그리고 그 경험에서 우러나는 자신감과 냉정함! 과연 이런 것들을 단시간의 조련에 의해 만들어 낼 수 있을까?

1994년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브라질을 예로 들어 보자. 당시 브라질 팀의 벤치에는 17세의 떠오르는 별 ‘호나우두’가 있었다. 브라질 팬들은 난리를 쳤다. 왜 호나우두를 기용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에 대한 페레이라 감독의 대답은 간단했다. 호나우두를 기용하는 모험수를 둘 만큼 브라질 팀은 절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 브라질 팀의 공격을 이끌었던 호마리우와 베베토는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결정이 가능했겠지만, 이미 그 천재성을 인정 받은 선수 조차도 월드컵 무대에 나서기에는 ‘검증이 덜된 모험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968년에 17세 소년 펠레가 혜성 같이 등장한 것도, 사실상 당시의 브라질 팀이 본선 1라운드에서 심한 득점력 빈곤에 시달리는 바람에 ‘모험을 감행할’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경험이라는 것, 특히 월드컵에서 뛰면서 득점까지 기록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홍명보는 우리 팀에서 꼭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과거 처럼 홍명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수비 전략으로는 강 팀들과 좋은 경기를 할 수 없다는 것에는 모두가 합의점을 찾았겠지만, ‘홍명보 없이’라는 단서가 붙었을 때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신예 송종국이 빼어난 활약을 보여주는 것이나 중앙 수비수로 변신한 유상철의 성공적인 모습은 홍명보 이외의 대안으로 충분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지, 그들이 그렇기 때문에 홍명보가 대표팀에 없어도 된다는 식의 전개는 홍명보라는 존재를 너무 가볍게 다루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적인 부담, 스피드, 힘 등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홍명보는 여전히 전성기의 기량과 함께 풍부한 경험에서 우러나는 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새로운 감독과 새로운 수비 시스템, 그리고 거기서 새롭게 적응하면서 10년 아성에 도전을 받았던 홍명보.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보여준 신예 수비수들의 활약. 그리고, 이 틈에 한 발 앞서 달려가는 홍명보에 대한 성급한 생각들…

과연 히딩크는 홍명보라는 카드를 버릴 만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 본다.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선택은 모험이 아니라 ‘도박’ 수준이라는 생각마저 들 것이다. 그가 실력에서 부족함을 보이지 않는 한, 대표팀 수비의 한 자리는 다시 홍명보에게 주어질 가능성이 크다.

홍명보를 가졌다는 것 만으로도 한국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더욱 강한 경쟁력을 가진다. 10년을 최고의 자리에서 호령했던 선수, 그만큼 독보적이었던 선수는 그렇게 쉽게 팽개쳐 지지 않을 것이다. 홍명보를 우습게 보지 말자. 아니, 그를 우습게 대하지 말자. 그 스스로의 기량에 밀려서, 혹은 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대표팀을 떠나지 않는 한, 그에게 한국 대표팀 부동의 주장에게 걸맞는 대우와 존경과 신뢰를 잃지 말았으면 한다.

자료제공: 후추닷컴

http://www.hooc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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