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78> 역사를 바꾼 팸플릿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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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출판평론가
표정훈 출판평론가
설명이나 광고 선전 등을 위해 만든 얄팍한 분량의 작은 책자, 팸플릿이다. 이러한 팸플릿과 책의 경계는 모호하다. 유네스코가 내린 책의 정의는 ‘겉표지를 제외하고 최소 49페이지 이상으로 구성된 비정기 간행물’이기 때문이다. 근대 서양에서 팸플릿은 정치적 사회적 주장을 펼치는 수단으로 널리 이용됐다.

토머스 페인(1737∼1809)이 1776년 1월에 펴낸 팸플릿 ‘상식(Common Sense)’은 간행 석 달 만에 10만 부 넘게 팔리면서 아메리카 식민지 사람들의 독립 의지에 불을 붙였다. 그는 영국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정부는 최고의 것이라도 필요악일 뿐이다. 최악은 참을 수 없는 정부다. 정부에 의해 괴롭힘당하거나 고통을 겪는다면 차라리 정부 없는 나라가 더 낫다.”(남경태 옮김·2012년)

영국의 존 밀턴이 발표한 ‘아레오파기티카’(1644년)도 팸플릿으로 분류되곤 한다. 밀턴은 출판물을 검열하려는 법을 철회하라고 주장하면서 언론 자유를 역설한다. “진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정책도, 전략도, 검열제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오류가 진리의 힘에 맞서 싸울 때 사용하는 수단입니다. 진리에게 자유로운 공간을 제공해주십시오.”(박상익 옮김·2016년)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시기 팸플릿으로는 에마뉘엘 시에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가 대표적이다. 그는 성직자와 귀족 계급을 비판하고, 제3 신분인 대다수 평민이야말로 진정한 국민임을 역설했다. “국민이란 무엇인가? 동일한 입법부에 의해 대표되며, 공통의 법률하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집단이다. 특권과 면제에 의해 귀족 신분은 공통의 질서와 법률에서 벗어나 있다.”(박인수 옮김·2003년)

조선시대의 팸플릿은 익명으로 체제나 특정 정치 세력을 비판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벽서(壁書) 또는 괘서(掛書)였다. “여왕(문정왕후)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기) 등이 권세를 부려 나라가 망하려 하니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 1547년(명종 2년) 경기도 과천 양재역 벽에서 발견된 이 벽서로 대규모 옥사가 일어났다.

사상사에 남거나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데 기여한 팸플릿도 있지만, 대다수는 허위와 과장으로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데 그쳤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의 팸플릿은 게시글이나 댓글이다. 예전 팸플릿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빠르고 광범위한 전파 속도와 범위가 그 악영향의 위험성을 키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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