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형의 생각하는 미술관]<47>욕심과 한계를 치유하는 정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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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8세기 프랑스는 사회 혁신 의지가 강했습니다. 시대의 부조리를 개혁하려 했던 시대는 고대의 이상과 정신을 동경했습니다.  

 미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재능 있는 미술학도는 로마 체류 기회를 얻었습니다. 고대 미술을 따라야 할 모범으로 익혔습니다. 그리스 조각에 내재된 조화와 비례, 안정과 균형이 예술의 미덕으로 자리 잡았지요. 로마 신화와 역사가 미술의 주제로 빈번히 채택되었지요.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이런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고대 철학자가 그림의 주인공입니다. 당시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참패 후 몰락과 부패의 길을 걷고 있었지요. 철학자는 폴리스의 젊은이들을 현혹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받았어요. 동료와 제자들은 부당한 법의 판결에 분개하며, 탈출을 강권했습니다.

 하지만 사상가는 악을 피하려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끝내 바꾸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플라톤을 비롯한 제자들이 오열하는 차가운 감옥을 마지막 강연장으로 삼았지요.

 화가는 그림을 아름다운 벽장식이 아닌 계몽의 도구라 믿었습니다. 도덕의식을 고취하고 혁명 정신을 일깨울 매개라 확신했어요. 이런 예술적 신념에서 미술가는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 주인공의 영웅정신이 극대화한 사건을 택했지요.

 그림 속 철학자는 지금 독이 든 잔을 향해 손을 뻗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감정을 흔들림 없이 통제하며, 고결함을 지키고 있군요. 

 “만일 이처럼 여유 있고 침착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면,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정신에도 불구하고 궤변가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루소의 언급처럼 철학자의 죽음은 의미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갈등을 경계하고, 사회 구성원과 조화를 이루며 정의로운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평생의 가르침을 죽음으로 책임지려 했으니까요.

 책임이라는 말이 어지러운 세상을 떠다니고 있습니다. 주어진 책임을 다했을 뿐 잘못은 없다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과오를 다른 이의 책임으로 전가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려의 시각에도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책임을 다하겠다는 사람도 있고, 다수의 만류에도 끝까지 국정을 책임지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책임에 관한 무책임한 말이 궤변처럼 난무하는 시대, 인간의 욕심과 한계를 치유할 실천으로 정의를 주장했던 그림 속 사상가의 말을 곱씹어 봅니다.

공주형 한신대 교수·미술평론가
#18세기 프랑스#자크 루이 다비드#소크라테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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