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韓美동맹과 쇠고기, 윈윈의 길

  • 입력 2008년 6월 9일 19시 59분


쓴 김에 조금 더 쓰면 안 될까.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30개월 이상 쇠고기가 한국에 수출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을 때 떠오른 생각이다. 협상은 우리가 잘못해 놓고 이런 말 하는 게 염치없지만 쇠고기 파동의 구조적 원인을 따져보면 꼭 무리한 요구도 아니다. 모든 것은 결국 한미동맹에서 비롯됐다. 한미동맹을 소중하게 여겼기에 복원(復元)부터 하려고 쇠고기 수입조건을 양보하는 바람에 사단이 난 것이다. 한미동맹이 복원되면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도 잘 풀릴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좀 더 아량을 베풀어도 괜찮다고 본다. 반세기가 넘게 혈맹(血盟)으로 지내온 한국이 바로 그 인연 때문에 곤경에 빠졌는데 그 정도 성의는 보일 수 있는 것 아닌가. 한국에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어렵사리 본궤도에 오른 한미관계가 다시 불편해진다면 미국에도 득이 될 게 없을 것이다.

국내정치와 국제정치는 상호 긴밀히 연관돼 있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른바 연계이론(linkage theory)인데 한미관계가 그 전형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60년 동안 두 나라에서 일어난 일치고 서로 맞물리지 않은 게 없다. 한국인들은 1980년대 미국 통상법 슈퍼 301조의 악몽을 잊지 않고 있다. 갑자기 높아진 무역장벽과 가중된 시장개방 압력으로 큰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반미(反美)감정은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통해 정치적으로 발화돼 미국의 통상압력을 거치면서 더 강고해진 감이 있다.

평택에서 본 얼굴들 다시 봐서야

연계이론에 따르면 한국과 미국은 ‘상호 침투돼 있는 체제’다. 촛불집회가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리고 있다면, 그 시간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도 같은 집회가 열리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적어도 양국 정부의 책임자들은 그런 인식을 갖고 문제를 봐야 한다. 우리 모두는 저 촛불이 빚어낼지도 모를 파국적 변형을 걱정한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의 선한 얼굴은 어느 순간 사라지고, 경기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에서 지겹게 보았던 얼굴들이 그 자리를 메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정부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도 미국은 이명박 정부를 도와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한국시장에서 미국 쇠고기가 호주산이나 뉴질랜드산과 경쟁하려면 한국 사람들이 안심하고 먹어줘야 한다. 소비자들이 불안해서 먹지 않는다면 어떤 협정도 소용이 없는 게 먹을거리 장사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구호야말로 미국적 자본주의의 정수가 아닌가. 서울의 맥도날드 햄버거 매장들이 ‘우리는 미국산 쇠고기를 안 쓰고 호주산을 쓴다’고 써 붙이는 나라가 한국이다. 일본이나 대만 핑계를 댈 일도 아니다. 한국이 선례가 될까봐 걱정한다는데, 거꾸로 한국시장에서 성공하면 일본 대만시장은 더 쉽게 얻을 수도 있다.

우리는 부시 대통령이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출 금지’를 약속한 것을 높이 평가한다. 어려울 때 돕고, 실수를 했더라도 만회하도록 배려하는 것이 동맹의 정신이다. 그래서 거듭 하는 말인데, 부시 대통령이 조금 더 성의를 보였으면 한다. 노력하면 실질적으로 재협상을 능가하는 ‘안심(安心) 장치’를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

예컨대 구두로 약속한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출 금지’를 업자들의 자율규제에만 맡길 게 아니라 정부 간 각서나 공동성명으로 보장만 해줘도 불안감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이에 대해 혹 경쟁국들이 “세계무역기구(WTO)의 자유무역규정에 위배된다”며 이의를 제기해도 한미관계의 특수성을 들어 버텨줄 수 있는 ‘의지’를 보여준다면 분위기는 더 달라질 것이다.

부시 訪韓 때 美 쇠고기로 만찬을

차제에 미국 내 관련 산업과 시설의 위생조건을 한 단계 높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불안해하는 한국의 소비자들을 미국으로 불러 소의 사육에서 도축 유통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일까. 이들이 현지에서 미국 업자들과 대화를 통해 상호 이해를 넓힐 수 있도록 주선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외교사학자 토머스 베일리(1902∼1983)는 “최상의 동맹은 상호이익의 조화에 기반을 둔다”고 했다. 지금 한미 양국이 그럴 때다. 이를 위해 부시 대통령이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와야 한다. 7월 그의 방한(訪韓) 때 두 정상의 청와대 만찬 메뉴는 미국산과 한국산 쇠고기 스테이크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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