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통미봉남의 함정에 더는 빠지지 말라

  • 입력 2008년 5월 26일 20시 22분


북-미(北-美) 접촉 얘기만 나오면 단골로 등장하는 게 ‘남한 왕따론’이다. 우리가 북한을 소홀히 대하면 북한이 미국과 가까워져 결국 우리만 왕따가 된다는 것인데 벌써 20년이 넘도록 우리 사회를 옥죄고 있다. 식량이든 경협이든 핵문제든 북이 미국에 다가가는 시늉만 해도 북-미가 남한을 따돌린 채 금방 수교라도 할 것처럼 법석을 떤다.

이번도 예외가 아니다. 북핵문제의 ‘진전’에 따라 미국 정부가 다음 달부터 북한에 50만 t의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하자 여기저기서 걱정하는 소리가 쏟아진다. “우리가 먼저 식량을 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외교적 고립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당장 식량을 보내라고 촉구하면서 “인도적 지원인데 뭘 망설이느냐”고 나무라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들은 ‘왕따론’의 함정을 모르거나 의도적으로 악용하고 있다. 북한은 통미봉남(通美封南)에 대한 남한사회의 두려움을 잘 안다. 우리는 불안하고 고단한 분단체제 속에서 살아온 탓에 늘 미국이 몰래 등 뒤로 북한과 손을 잡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해왔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7·7선언을 통해 “북-미관계 개선에 협조하겠다”고 천명한 후에도 불안감은 여전해 ‘북-미관계는 남북관계와 함께 가야 한다’는 ‘병행 발전론’으로 맞설 정도였다.

북한은 지금도 우리 의식 속에 잔설(殘雪)처럼 남아 있는 이 두려움을 십분 이용하고 있다. 미국과 몇 차례 직접대화만 해도 비상이 걸리고, “한반도문제의 주도권이 북-미로 넘어간다” “북한과 당장 대화하라” “식량을 줘라”는 목소리들이 튀어나오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통미봉남’만 외치면 남쪽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다 알아서 해주는 꼴이다.

‘왕따’ 될까봐 南이 알아서 식량 줘

정형근 한나라당 의원의 경우를 보자. 당내 남북관계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19일 보고서를 통해 “북한은 아사자(餓死者) 발생 초기단계로 주민들은 풀죽과 벼뿌리를 먹고 있다”며 지금 식량을 지원해야 5∼7월에 발생할 아사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 역시 그 선의(善意)에도 불구하고 북의 통미봉남에 말려들 가능성이 높다.

외교통상부와 통일부가 대북 식량지원 문제를 놓고 “북의 요청이 없어도 할 수 있다” “안 된다”며 맞서고 있는 상황도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기 바란다. 대북 식량지원이 무조건 안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왕따가 안 되려면 북에 식량지원을 해야 한다”는 논리로는 문제 해결에 더는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을 바꿔야 한다. 왕따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지원의 기준이 되기보다는 북한의 식량난을 실질적으로 해소할 수 있느냐가 기준이 돼야 한다. 지난 10년 가까이 북한에 매년 40만∼50만 t의 식량을 퍼주면서도 북한의 식량사정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북의 ‘통미봉남’과 우리 사회의 왕따론에 휘둘린 탓이다.

식량을 주더라도 북한의 농업생산기반 확대나 영농방법 개선 등을 요구해 관철시켰더라면 사정은 나아졌을 것이다. 온통 퍼주면서도 이를 소홀히 한 두 정권의 책임이 크다. 노 전 대통령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10·4정상선언에도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 개보수 사업’은 들어 있지만 본격적인 농업협력사업은 포함돼 있지 않다. 북한으로선 넣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통미봉남’만 하면 못줘서 안달인데 굳이 정상선언에 포함시켜 다른 지원항목 하나를 빠뜨리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북한의 식량지원 요청 유무(有無)도 큰 문제가 아니다. 요청이 있건, 없건 주고 싶으면 줄 수 있는 것이다. 정부가 나서기 어려우면 미국처럼 비정부기구(NGO)와 국제기구를 동원하면 된다. 참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인내하는 것도 훌륭한 대북정책이다.

문제는 잘못된 대북 식량지원의 대가(代價)를 대체 언제까지 치러야 하느냐다. 올해도, 내년에도, 그리고 내후년에도 수십만 t의 쌀을 꼬박꼬박 실어 보내야 하는가. 앞으로 몇 대(代)가 지나야 이 무거운 짐을 벗게 될 것인가. 식량위기로 앞으로 세계 인구 10억 명이 생사(生死)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먹기에도 쌀이 부족한 시대가 곧 올 수도 있다. 물고기를 주기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고 했다. 이명박 정부는 이제라도 대북 식량정책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짜서 다음 세대의 짐을 덜어줘야 한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ea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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