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청도, 낮은 곳에서 온 충격

  • 입력 2008년 2월 4일 19시 50분


4월 총선에 나갈 한 선배에게 “돈 없이 무슨 선거를 치르겠느냐”고 걱정 삼아 한마디 했더니 “이번엔 그래도 괜찮아, 청도 때문에 분위기가 확 바뀌었거든” 한다. 하긴 그렇겠지. 경북 청도군을 보면서 어떤 후보인들 돈 쓸 생각을 하고, 어떤 유권자인들 돈 받을 생각을 하겠는가. 수도권에서 출마할 몇몇 후배도 같은 말을 했다. “맹물 한 컵을 놓고 지역구 행사를 해도 마음이 편하고, 운동원이나 참석자들도 한결 조심하는 분위기라 좋네요.”

한국 사회에서 변화는 항상 극적인 경로(經路)로 온다. 무슨 일이든 터져야 정신을 차린다. 다리가 끊어지고 백화점이 무너져야 안전에 신경을 쓰고, 기름이 시커멓게 해안을 뒤덮어야 환경오염의 무서움을 안다. 청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군수 재선거 과정에서 주민 5700여 명이 돈을 받아 군(郡)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고서야 모두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군수가 구속되고, 돈을 돌린 사람이 자책감에 둘이나 자살하고, 돈 받은 주민들이 관광버스를 빌려 단체로 경찰에 자수하러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앗, 뜨거워” 하는 것이다.

역사는 악의(惡意)를 먹고 자란다고 했던가. 청도 덕분에 돈 선거가 사라지게 된다면 불행 중 다행이다. 연루된 주민 한 사람당 5만 원에서 10만 원을 받았다고 하니 법대로 50배의 벌금을 물릴 경우 토해 내야 할 돈은 250만 원에서 500만 원에 이른다. 어려운 시골 살림에 큰돈이다. 죄의 대가(代價)이나 그 대가로 선거 풍토가 더 깨끗해지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맹물 한 컵 놓고 지역구 행사

요즘 예비 출마자들은 돈 안 쓰고 선거운동을 할 궁리에 여념이 없다. 대선 때 이명박 캠프가 시도했던 ‘향기 마케팅’을 검토 중인 사람도 있다. 유세장에 향수를 뿌리거나, 주민들과 악수할 때 선거운동원이 옆에서 스프레이어로 향수를 뿌려 줘 향기처럼 유권자들의 가슴에 스며들겠다는 것이다. 주민들과 악수하는 모습을 일일이 사진으로 찍어 당사자들에게 보내 줄 생각인데 선거법에 걸릴까 봐 걱정이라는 사람도 있다. 한결 밝아진 풍경들이다.

청도 사건은 공천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일깨운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공천도 한몫했다. 공천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안 해서다. 한나라당이 공천비리를 우려해 공천을 포기하는 바람에 3명의 무소속 후보가 혈투를 벌였고 끝내 돈질이 벌어진 것이다. 한나라당의 텃밭인 이곳에서 공천만 제대로 했어도 후보 간에 우열이 쉽게 가려져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정당에 단체장은 물론 기초의원 공천권까지 준 것은 엄혹한 판관이 되어 교통정리를 하라는 것이었는데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다.

청도는 돈 선거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이제는 ‘아래’로부터 ‘위’로 옮아가야 함을 보여 준다. 징벌적 배상이나 다름없는 50배의 과태료 때문에 아래로 뿌려지는 돈은 청도처럼 쉽게 드러나지만 공천을 노리고 위로 올라가는 돈은 여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과거에 비해 비리가 줄었다고 하나 은밀히 이뤄지는 거래의 깊은 속을 누가 알까. 한나라당만 해도 단체장 공천 과정에서 중진의원 또는 그 가족이 금품이나 선물을 받아 법정에 선 게 엊그제다.

겉으로 드러나는 돈 대신 공천 약속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국회의원 공천 비리는 거의 사라졌다고? 글쎄다. 서울에서 출마할 한 지인은 공천을 놓고 경합 중인 상대방이 당 발전기금으로 얼마를 내 승부는 이미 끝났다고 떠들고 다니는 바람에 죽을 맛이라고 털어놓았다. 그가 냈다는 당 발전기금이 공천 대가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으나 아래로 뿌려지는 돈이 아니라 위로 올라가는 돈임에는 틀림없다.

아래로 뿌려지는 돈, 올라가는 돈

이 대목에서 나는 청도 사람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그들이 받은 5만 원, 10만 원은 소득 수준이 높고 번듯한 대도시에선 결코 큰돈이 아니다. 청도보다 풍요롭고 윤택한 곳에선 그 정도의 돈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사람은 단언컨대 없다. 5만 원의 몇천 배, 몇만 배가 공천 대가로 오가도 누구 하나 밤잠을 못 이루지 않는다. 고향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며 수화기를 내려놓고 지내는 사람도 없다.

청도 사람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애잔한 방법으로 세상에 충격을 줬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그들의 고통을 끌어안고, 죗값도 나눠서 치러야 하는 것은 아닌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이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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