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핵 시계를 실용적으로 되감는 법

  • 입력 2008년 1월 7일 20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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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경제 경제 하지만 북핵문제가 이명박 정부에 첫 시련이 될 것 같다. 10·3합의대로라면 작년 말까지 북의 핵시설 불능화와 핵 프로그램 신고가 끝났어야 한다. 한미 양국 정부는 “기다려보겠다”고 하지만 그런다고 풀릴 것 같지 않다.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담당 보좌관 빅터 차가 지난주 우려한 것처럼 장기화할 조짐마저 있다.

북한 외무성은 4일 대변인 성명을 통해 “우리는 자기 할 바를 다했는데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우리를 삭제하고, 적성국무역법 적용을 종식시킬 의무는 이행되지 않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도 “10·3합의의 원만한 이행을 기대한다”고 여지를 뒀다. 끈을 놓았다 당겼다 하면서 시간도 벌고 판돈도 키우는 수법이 여전하다. 이러기를 벌써 십수 년째다.

베이징대 왕지쓰(王緝思·국제관계) 교수가 지난해 10월 한중문화협회(총재 이영일) 초청 강연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북이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핵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사회가 북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곡을 찌른다. 국제사회가 희망을 접는 순간, 북은 꿩도 매도 다 놓치게 될 테니까.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대북정책은 ‘비핵·개방·3000’이 핵심이다. 북이 핵을 폐기하고 개방으로 나오면 10년 안에 1인당 소득이 3000달러가 되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400억 달러의 국제협력기금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런데 북이 쉽게 핵을 폐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이런 정책들이 실행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핵 폐기 없이 대규모 대북(對北) 지원을 한다면? “노무현 정권의 퍼주기와 다를 게 뭐가 있느냐”는 비난부터 쏟아질 것이다.

핵과 대북정책 접점 찾아야

그렇다고 남북관계를 경색국면으로 가져갈 수도 없다. 그 여파가 경제 전반에 미칠 수 있다. 그래서 말인데,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노무현 정권이 10·4 남북 정상회담과 이후 각급 회담에서 북과 합의한 사항이 190여 개에 이른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도 어제 통일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일부 비치긴 했지만 그 이행을 핵 문제와 연결시켜 나가자는 것이다. 북핵 폐기와 관계없이 할 수 있는 것, 핵 폐기의 진전을 봐 가며 해야 할 것, 핵 폐기 없이는 안 되는 것 등 세 그룹으로 나눠 북과 대화를 계속하면서 한편으론 미국의 이해를 구하자는 얘기다.

이 경우 ‘겨레말 큰 사전’ 발간, 기상정보 교환, 2008 베이징 올림픽 공동응원, 환경오염 방지, 이산가족 영상편지 교환 등은 첫 번째 그룹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인수위가 어제 밝힌 쌀과 비료 등 인도적 지원도 물론 여기에 들어간다. 두 번째 그룹에는 서울∼백두산 직항로 개설, 조선협력단지 건설을 위한 안변·남포지역 현지 조사, 개성공단 2단계 개발에 필요한 측량지질조사 등이 해당될 것이다. 끝으로 세 번째 그룹에는 서해 공동어로구역 설정,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해주 직항로 개설, 개성∼평양 고속도로와 개성∼신의주 철도 개보수 등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북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남북대화의 일관성과 모멘텀도 유지할 수 있다. 정권이 보수에 넘어갔다고 해도 남북관계를 아주 단절할 생각이 아니라면 모든 합의를 다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당선인의 대북 원칙인 ‘유연한 상호주의’와도 맞지 않다. 미국을 설득하는 데도 효과적일 것이다. “전(前) 정권에서 합의한 것들이라 가능한 한 지켜야 하지만 한미(韓美) 공조를 고려해 그 폭을 최소화, 현실화했다”고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4강 특사 어깨 무겁다

노 정권 5년 동안 한미관계가 틀어진 근본 원인은 대북정책과 북핵문제를 둘러싼 인식의 불일치와 불신(不信)에 있었다. 노 정권이 미국의 처지를 생각해 대북 경협이나 지원의 속도를 한 템포만 늦췄더라도 양국 관계가 그토록 삐거덕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 정부에선 그런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 그러려면 처음부터 우리의 기본 방향과 정책을 정확히 알려줌으로써 불신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막아야 한다. 이 당선인의 특사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가는 정몽준 박근혜 이상득 이재오 의원의 어깨가 무겁다. 그들이 첫 단추를 잘 끼워 줘야 핵도 대북정책도 순조롭게 풀린다. 한미 공조는 물론이고 4강 공조와 6자회담의 실질적 진전도 기대할 수 있다. 이게 핵 시계를 멈추게 하는 가장 실용적인 출발이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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