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방형남 칼럼]사랑이 이긴다

  • 입력 2004년 6월 30일 18시 05분


코멘트
‘한국의 친구들이 이라크 친구들에게.’

김선일씨는 동료들과 함께 담요 5000장에 일일이 인사말이 새겨진 꼬리표를 달았다. 미군과 수니파 저항세력의 치열한 전투로 집을 잃은 이라크 팔루자 주민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틀 밤을 꼬박 새워 작업을 했다. 4월 말의 일이다. 팔루자 주민을 돕기 위해 이라크 주재 한국대사관이 담요 무상 전달 계획을 세웠고 가나무역이 사업체로 선정된 것이다.

그러나 담요는 팔루자 성직자 단체 책임자의 외국 출장 때문에 전달되지 못했다. 주인을 찾지 못한 채 현재 바그다드 가나무역 창고에 쌓여 있다고 연합뉴스 특파원이 전했다.

▼전하지 못한 ‘한국인의 우정’ ▼

만약 담요가 팔루자 주민에게 전달됐더라면…. 김씨가 팔루자를 근거지로 하는 테러단체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때늦은 한탄이지만 불행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이 좀 더 빨리 피랍사실을 정부에 알렸더라면, 외교부 직원들이 AP통신의 문의를 묵살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김씨의 죽음은 더욱 안타깝다.

10여일간 슬픔과 분노로 전국을 흔들던 청년 김선일이 어제 우리 곁을 떠났다. 잔혹한 범죄의 희생자인 그의 영결식은 놀랍게도 용서와 화해의 행사로 치러졌다. 이별을 슬퍼하는 눈물은 증오와 분노를 깨끗이 씻어 내렸다.

“선일이가 죽기까지 당신들을 사랑했듯이 그 사랑으로 우리 모두는 당신들을 용서합니다. 우리 모두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나라 이라크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선일이의 꿈이었음을 선일이를 대신하여 당신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유족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메시지는 지금쯤 이라크에도 도착했을 것이다.

느닷없는 반전(反轉)이 아니다. 김씨가 담요에 담아 보내려던 ‘한국인의 우정’은 이라크 국민에게 전달되지 않았으나 육성으로 남긴 사랑이 모두를 움직인 것이다. 그는 억류된 상태에서 AP 동영상을 통해 “이라크인들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친구에게 보낸 e메일에서는 “이라크 여성과 결혼해 평생 이슬람 국가에서 살고 싶다”는 계획을 펼치기도 했다.

이라크에서 저질러진 잔혹한 범죄가 한국에서 용서와 사랑으로 승화된 것이다. 기적 같은 일이다. 이라크인들도 김씨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았다. 방한 중인 하미드 무사 이라크 문인협회장은 추모시 ‘고 김선일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이라크인들의 마음을 전했다.

‘그들이 당신 선일씨를 죽였을 때/당신의 피는 우리 이라크 국민의 머리를 따라 흘렀으며/그래서 우리의 외침과 뒤섞였습니다/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오늘, 우리의 어머니는 당신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마치 당신이 그들의 자식인 양/우리의 아이들도 당신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마치 당신이 그들의 아버지인 양/나 또한 당신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당신은 이제 나의 형제가 되었기 때문이죠/피로써, 고통으로써, 그리고 죽음으로써’

▼한국과 이라크 손잡다 ▼

비록 비극적인 죽음이 계기가 됐으나 이라크는 더 이상 한국에 중동의 먼 나라가 아니다. 범죄를 용서한 한국인과 김씨의 억울한 죽음을 위해 눈물을 흘린 이라크인은 손을 잡을 수 있다. 자이툰부대 파병을 다른 각도에서 볼 여유도 생기지 않는가. 이 시점에서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기 위해 애쓰는 대다수 이라크 국민을 돕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

김씨가 믿던 기독교는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사랑의 종교다. 그는 한국과 이라크 사이에 사랑의 씨앗을 뿌렸다. 유족은 사랑이 증오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 줬다. 그의 죽음이 이라크에 ‘대포를 녹여 쟁기를 만드는’ 평화가 정착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려 보며….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