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우남 백범 몽양, 빈 프라하 서울

  • 입력 2005년 3월 2일 18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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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경우 우익 글씨는 크고 좌익 글씨는 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좌익은 말이 많은 만큼 선전문이 길고 우익은 말이 뜬 만큼 선전문이 짧다”(최일남 창작집 ‘석류’).

8·15 광복 이후 좌우의 싸움을 작가는 이처럼 감각적인 몇 마디로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그걸 ‘달변과 눌변의 싸움’이라 적은 일이 있다.

달변의 좌익 선두엔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이 있었다. 그는 광복 후 가장 먼저 대중 앞에 나타나 사자후(獅子吼)한 대웅변가였다. 그의 말은 처음 신문을 보는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조리가 있었다. 눌변의 우익 정상에는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이 있었다. 미국 망명 수십 년 만에 귀국한 우남의 한문투성이 연설(문)은 ‘하와이에서 굳어버린 19세기 조선말’로 우선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몽양을 좋아하고 따르고 했대서 놀랄 일도 아니고 탓할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극좌 극우를 마다한 대부분의 어중간한 사람들은 우남의 단호한 반공 노선보다 우사 김규식(尤史 金奎植)과 좌우합작을 모색한 몽양의 노선에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몽양-백범의 좌우합작 노선▼

북한에선 소련이 장악한 동유럽 제국처럼 우익을 고립시키기 위한 통일전선(민전·民戰)이 결성되고 좌익 정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을 조직했다. 남한에서도 그에 따라 민전이 결성되고 공산·인민·신민 3당이 합당해 남로당이 조직됐다. 그러나 인민당 위원장 몽양은 그에 참여하지 않고 따로 근로인민당을 창당했으나 이내 암살당하고 만다. 정부 수립을 1년여 앞둔 시점이었다.

한국 문제가 유엔에 상정돼 자유선거가 가능한 지역, 남한에서 소위 ‘단독’ 정부를 수립한다 했을 때 우익의 또 다른 지도자 백범 김구(白凡 金九)는 그를 반대하고 우사와 함께 월북해 김일성 김두봉을 만나 분단을 막고 좌우 합작을 성사시켜 보려 마지막 시도를 했다. 그 시도의 성패나 잘잘못을 떠나 분단을 마다한 많은 사람들이 그때 백범에게 나부꼈다고 해서 역시 놀랄 일도 탓할 일도 못 된다. 그 백범도 이내 암살자의 흉탄에 쓰러지고 만다.

6·25전쟁의 발발은 ‘어중간’을 쓸어버리고 좌우가 대치하는 전선을 선명히 했다. 1953년 휴전 후 반세기…. 세월은 모든 걸 폭로하고 심판한다. 해방공간 좌우 투쟁은 필경 우리가 서쪽의 다원주의 자유체제에 자리하느냐, 아니면 동쪽의 소비에트 독재체제에 자리하느냐의 싸움이었다.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남한은 소비에트화에서 벗어나 다원주의 체제로 가는 터를 마련했다. 그것은 인기가 있던 몽양이나 백범, 우사가 아니라 인기 없던 우남, 그리고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의 역사적 업적이다. 많은 사람은 그걸 늦어도 1980년대 말 동유럽 소비에트 체제가 붕괴될 때 알게 되었다. 만일 해방공간에서 우남이 아닌 몽양이 남한 정국의 조타수가 되었더라면, 혹은 평양에서 개최된 소위 ‘4김(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회담’이 남한 단정 수립을 막았더라면?

물론 역사에 가정법은 없다. 분명한 것은 그 경우 한반도는 전역이 소비에트화가 됐을 것이라는 점이다. 1948년의 프라하 정변처럼 공산당과의 연정은 조만간 공산당 일당독재로 귀결하고 만다. ‘냉전의 기적’이라 한 1955년 오스트리아 중립화 통일은 흑(黑)과 적(赤)의 모자이크라 일컫던 좌우 연립정부의 성취이지만 중요한 것은 빈의 좌우연정엔 공산당은 제외되었다는 사실이다.

▼건국은 우남-인촌의 업적▼

이번 3·1절에 몽양을 포함한 많은 좌익계 독립운동가들이 훈·포장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이제 더욱 다원주의화되고 있다는 듬직한 징표이다. 그동안 건국훈장을 수상한 명단을 보니 대한민국 단정에 반대했던 백범, 우사는 물론 몽양의 인민당과 근민당 부위원장이었던 장건상, 몽양의 건국준비위원회에 부위원장으로 참여한 안재홍의 이름도 이미 들어 있다. 북쪽과 달리 남쪽의 정치·이념적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대한민국은 역시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최정호 객원 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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