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일과꿈]허석/디지털지도 만들기 10년

  • 입력 2004년 7월 28일 1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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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끝나는 곳에서 우리의 여행은 시작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가장 잘 표현한 말 같다. 지도를 만들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닌 지 10년. 20대 후반과 30대 대부분의 시간을 고스란히 길 위에서 보낸 셈이다.

1995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자동차용 길 찾기 시스템을 출시하기 위해 여러 회사가 한창 경쟁을 벌일 때, 나는 그 신기한 기계를 통해 사용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정확하고, 편리한 지도를 보여 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어릴 적부터 여행을 무척이나 즐겼다.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그저 이름 없는 산이든 바다든 낯선 곳에 가는 것 자체를 즐겼다. 요즘도 시간만 나면 나는 차를 타고 목적지 없이 집을 떠나곤 한다. 대학에선 땅과 땅 위의 시설물을 공부하는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국 부모님께 물려받은 방랑벽(?)과 땅에 대한 관심이 나를 길 위에서 살아가게 한 것 같다.

전자지도는 최종적으로 컴퓨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파일 형태로 존재하지만 그 지도를 만드는 과정은 수많은 인력과 수작업을 필요로 한다. 국내 지형지물 측량 지도를 구입해 이를 스캐너를 통해 컴퓨터용 파일로 만들고, 이 파일을 통해 모든 도로를 종류별로 나눈다. 그 도로에 차로나 폭 등은 물론 일방통행, 자동차 전용 여부 등 많은 속성정보를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입력하게 된다.

건물의 형상이나 강 호수 바다 섬 등 배경도 마찬가지 작업을 거친다. 사용자가 가고자 하는 곳을 쉽고 정확하게 찾을 수 있도록 주소나 상호, 빌딩 이름 등을 입력하고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는 작업까지 모두 사람의 손을 통해 이뤄진다.

한번 데이터를 만들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새로운 길이 생기고, 도로가 넓혀지며, 상점이 없어졌다가 새로운 집이 생기기 때문이다. 짧게는 일주일, 길면 한 달이 넘게 차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것, 바뀐 것, 없어진 것들을 일일이 찾아내야 한다. 새로운 정보를 입력한 최신 지도 데이터가 생성되어 나오고 거기서 내가 발로 얻어 온 정보가 보일 때의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뒤틀리고 굴곡이 심한 첩첩산중의 외딴길을 지날 때면 나는 그 옛날 지도를 만들기 위해 오로지 발에 의지해 이 멀고 험한 길을 왔을 선배들이 생각나 고개를 숙이곤 한다.

1년에 수개월을 길에서 보내다 보니 구입한 지 얼마 안 된 자동차는 금방 고물이 되고 가끔은 도로 한가운데서 멈춰 서는 일도 생긴다. 졸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비몽사몽간에 운전할 때도 있다. 폭설이나 폭우로 조사가 중단돼 고객과 약속한 시일 안에 최신 정보를 제공하지 못할까봐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한다.

그래도 나로 하여금 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유가 있다. 내가 고생해 얻은 정보로 누군가는 시간을 절약하고, 귀중한 생명을 구할 수도 있을 거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 내 후배들이 지금 내가 힘들게 돌아다닌 덕분에 조금이라도 수고를 덜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삶의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약력] 1969년생으로 안양과학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뒤 1995년부터 지리정보시스템(GIS) 제작 업무를 담당하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팅크웨어㈜의 GIS개발부 수석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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