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일과 꿈]이태원/'명성황후' 는 내 삶의 날개

  • 입력 2003년 4월 16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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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18일부터 6월 14일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리는 뮤지컬 ‘명성황후’의 북미 투어를 위해 막바지 연습에 땀을 흘리고 있다.

무대에 설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묘한 흥분이 내 몸을 감싼다. 첫 무대에 설 때의 그 느낌 그대로다.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 잠깐의 정적과 함께 이어지는 관객들의 갈채와 환호가 기다려진다.

▼성악에 흥미잃고 뮤지컬 배우로 ▼

성악을 전공한 미국 줄리아드 음대 시절, 성적도 좋았고 주위의 기대도 컸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클래식에 흥미를 잃어갔다. 그 시절 내 유일한 꿈은 결혼해서 현모양처로 사는 것일 정도로 전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점점 자신감을 잃어갈 즈음 성악 담당 개인 반주자였던 아일린이 내게 브로드웨이 뮤지컬 ‘왕과 나(King and I)’의 오디션을 제안했다. 그 전까지 내게 뮤지컬이란 중학교 시절 단체관람으로 본 ‘사운드 오브 뮤직’과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전부였다.

그런데 아일린에게서 뮤지컬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와는 거리가 멀 줄 알았던 뮤지컬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1년 6개월의 길고도 가슴 졸였던 오디션을 거쳐 티엥 왕비 역을 맡아 브로드웨이 첫 오프닝나이트에 서던 날, 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2시간여의 공연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공연이 끝나고 쏟아지는 관객들의 갈채, 내 삶은 새롭게 시작됐다.

그렇게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배우 생활을 하던 나는 1997년 서울에서 창작뮤지컬 ‘명성황후’의 주연배우를 뽑는다기에 무작정 연출자 윤호진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금은 무모해 보였지만 운명과도 같았던 명성황후와 나의 첫 만남이었다. 어렵게 캐스팅돼 뉴욕 공연까지 남아 있던 연습기간은 단지 보름뿐이었다. 동료 배우들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부를 곡은 전체 수록곡 중 절반에 가까운 20여곡이나 됐다. 솔직히 나 스스로도 벅차게 느껴졌다. 오랜 미국생활로 인해 옛 우리말이 많았던 가사의 뜻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 뮤지컬의 미 브로드웨이 공연 자체가 국내에서조차 미친 짓이라고 여겨진 탓에 모두 힘들어 하던 상황이었다.

이때 명성황후 역을 맡은 나까지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보름 동안 악보와 명성황후에 관한 책을 하루 24시간 떼지 않으며 이태원이 아닌 명성황후로 살았다. 처음에 ‘과연 저 여자가 해낼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갖던 선후배 동료 배우들과 스태프도 차츰 내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 우리는 결국 ‘명성황후’ 뉴욕 공연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수없이 많은 앙코르 공연을 하면서 ‘명성황후’는 내게 단지 뮤지컬 작품이 아니라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명성황후’를 하며 울고 웃던 수많은 추억들이 생각난다. 명성황후 시해 장면에서 실제로 칼에 손을 찍혀 뼛속까지 스며드는 아픔을 참고 공연한 일, 공연 중 급성 A형 간염에 걸려 두 달간 입원하라는 권유에도 끝까지 무대에 섰던 기억….

▼단 보름간 연습만으로 공연 성공 ▼

이제 내 나이도 서른을 훌쩍 넘어버렸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난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사는 한 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여동생과 함께 노래를 배웠지만 실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뮤지컬을 통해 진정한 나만의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내게 날개가 되어준 티엥 왕비와 명성황후. 나를 날게 해준 이들을 딛고 새로운 곳으로 날아가야 하리라. 무대 위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불어 넣어주는 그런 날갯짓으로 살아가고 싶다.

▼약력 ▼

1966년 생. 가족과 함께 미국 일리노이주로 이민(1981년). 미국 뉴욕 줄리아드 음대 성악과 및 동 대학원 졸업(1992년).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 ‘왕과 나’ 왕비 역에 캐스팅(1995년). 뮤지컬 ‘명성황후’ 주연(1997년). 사회풍자 뮤지컬 ‘유린타운’ 출연(2002년). 자전 에세이 ‘나는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다’(넥서스·2003년) 출간.

이태원 뮤지컬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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