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 열린마음 열린세상]시든 카네이션

  • 입력 2003년 5월 14일 18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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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끝이라 제주 공항은 붐비고 있었다. 시간에 쫓겨 서둘러 걷고 있는데, 그 할머니의 처연한 모습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공항 경찰이 나란히 앉아 대화를 시도하지만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겁에 질린 표정, 움푹 파인 눈엔 눈물도 말랐다. 어버이날이 사흘이나 지나 할머니 가슴에 달린 카네이션도 말라 있었다. 이따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찌든 눈가엔 온 세상을 원망하듯 지친 핏발이 서 있었다.

두고 간 자식을 원망하겠지, ‘어떻게 키웠는데’ 분통이 터진다. 북받치는 설움을 못 견뎌 자살하는 노인도 있다. 이게 한국 노인의 안타까운 현주소다.

거기에 비해 일본 노인은 ‘깨끗이 죽기 위해’ 자살한다. 사랑하는 가족, 친지에게 사경(死境)을 헤매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갑자기 중풍이라도 와서 식물인간으로 중환자실에 몇 해 동안 있게 된다면 그 지겨운 부담을 가족과 사회에 지게 할 순 없다. 품위 있는 모습을 남기고 가겠다는 것이다.

한일 정신학회에서 일본 학자의 다음 이야기도 참 인상적이었다. 효? 아이들이 잘 해준다면 더없이 고맙겠지만 안 한다고 서운해 하진 않겠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아이들은 우리가 낳고 기른 은공을 어릴 적에 이미 다 갚지 않았느냐. 방긋방긋 웃고, 서고, 걷고, 그리고 말 한 마디 익힐 적마다 얼마나 경이로웠던가. 대단한 감동이었다. 녀석이 피우는 재롱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박수치고 웃고, 애비는 비디오를 찍고 모두들 얼마나 행복해 하였던가. 이보다 더 소중한 기쁨이 또 어디 있을까. 녀석이 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뒷모습, 얼마나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던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보람이었다.

뭘 더 바라? 그만하면 됐다. 갚고도 남는다. 낳아 주신 은혜라지만 좀 큰 틀에서 볼 수도 있어야 한다. ‘인간은 울면서 태어난다’고 한 선현의 뜻도 생각해 보자. 아이의 인생이 장밋빛만은 아니다. 이건 아이가 바란 것도 아니다. 그래도 아이는 온갖 기쁨을 다 주었다. 사랑은 되돌아오길 바라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빚이 아니다. 아이는 빚쟁이도 아니요, 노후 보장용 보험도, 투자도 아니다.

아이에게 베푼 사랑은 내가 그러고 싶어서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행여 서운한 기분이 한결 덜 할 것이다. 아이들이 잘 해준다면 덤으로 생각하고.

인도의 거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는다. 우리로선 좀 서운도 하고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네들 생각은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베풀면 베푼 사람에게 그만큼 좋은 일이 생긴다. 고로 준 사람이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 제 기분 좋아서 하는 일에 내가 무슨 감사를? 이게 인도 거지의 생각이다.

스페인 거지는 한 술 더 뜬다. 아주 거만하다, 줄 테면 주고 말 테면 말아라. 아주 배짱이 두둑하다. 모자만 벗어 놓고 자기는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즐긴다. 죽는 시늉을 해야 겨우 돌아보기나 하는 우리 거지 신세와는 너무 딴판이다.

베풀되 바라질 말아야 하는 건데 괜히 다 주어버렸다고 뒤늦게 후회다. 요즈음 우리 연배의 풋영감들이 모이면 이런 타령이 단연 화두다. 며느리가 괘씸하다는 불평도 더러는 있다. “어떻게 키웠는데, 자기가 딱 차지하고선…. 그게 누구 돈인데?” 이 말까지 하고 싶지만 참는 게 역력하다.

아직 갈 길은 먼데, 생각하면 아찔한 기분도 든다. 효를 믿을 수도 없고 국가, 사회, 누구도 나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누구를 믿을 수도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질 수밖에 없는 가혹하고 어두운, 참으로 무거운 현실 앞에 우린 서 있다.

그걸 인정하자.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찌 이럴 수가? 낯선 대합실에 엄마를 남겨두고 혼자 비행기에 올랐을 그 젊은이의 가슴에도 사람의 심장이 뛰고 있었을까? 어머니 가슴에 카네이션이 말라비틀어져도 그 젊은이 가슴에 피가 흐르고 있을까.

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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