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 열린마음 열린세상]히딩크를 연구한다고요?

  • 입력 2002년 6월 26일 18시 59분


여기는 정상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 정상에 우뚝 서 있다. 정말 잘 했다. 잘 싸웠다. 후회 없다. 뭘 더 바라는가, 정상의 희열, 엑스터시에 들떠 있지 않은가.

월드컵은 단순한 축구경기가아니다. 우리는 100년 넘게 앓아온 서양콤플렉스를 후련히 털어 냈고 자신감에 넘쳐 있다. 그리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한 순간이다. 우린 지금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그리고 우리 젊은이들에게 처음으로 자율의식의 위대함을 몸에 익히게 했다. 어떤 체험이 이보다 더 소중할까. 우리가 얻은 정신적 자산은 돈으로 다 따질 수도 없다.

▼기본-원칙에 충실했을 뿐▼

이 감격, 이 감동을 우리에게 안겨준 거스 히딩크 감독에 대한 감사와 찬사는 무슨 말로도 다할 수 없다. 히딩크 감독을 배우자는 열기는 너무도 당연하다. 경영과 정치만이 아니다. 모든 분야에서 온 나라가 히딩크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다. 물론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꿈도 꿀 수 없던 일이 아니던가. 권위 있는 연구소에도 히딩크 전문연구팀이 발족되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자. 그로부터 배울 게 진정 무엇인가를 따져보자. 그가 남긴 공적을 치하하고 기념관을 세우는 건 좋다. 하지만 히딩크 연구라니. 무슨 연구를 하자는 건지 난 그게 무척 궁금하다. 그가 새로운 걸 한 건 없다. 우리가 모르는 걸 그가 알고 있는 것도 없다. 그가 아는 건 우리도 다 알고 있는 일들이다. 딱 한 가지 차이라면 그는 아는 걸 그대로 실천했고 우리는 알면서도 못한 것뿐이다. 역대 감독들이 몰라서 못했던가.

한국식 축구라지만 이건 이미 박종환 감독이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4강 신화를 이루면서 우리도, 그리고 세계도 놀라게 한 낯익은 전술이다. 하지만 그가 대표팀을 맡고선 특유의 색깔은 사라지고 다시 ‘한국식’ 잡탕밥이 되고 말았다. 연구를 하려면 여기서부터 해야 한다. 그가 왜 자기 소신대로 할 수 없게 되었는지 이걸 연구해야 한다.

히딩크 감독은 누가 뭐래도 자기 소신대로 했다. 아니 원칙대로 했다. 선수 선발부터 백지에서 시작했다. 이 선수를 빼라, 저 선수를 넣어라. 누가 뭐래도 듣지 않았다. 인맥, 혈맥, 학맥을 철저히 무시하고 능력 위주로 뽑았다. 이건 물론 감독으로서의 기본 원칙이다.

포르투갈전에서 그림 같은 결승골을 넣은 선수 박지성. 우리에겐 생소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거함을 일격에 무너뜨리곤 ‘쉿!’ 입에 손을 대고 (아무 말도 하지 말란 뜻이렷다) 히딩크 감독에게 덥석 안겼다. 무명을 세계적 스타로 키워준 스승의 품, 얼마나 고마웠을까. 한국인 감독이 대표팀을 맡았어도 저리 찡한 인간적 감동을 지켜볼 수 있었을까.

히딩크 감독은 기본기부터 닦았다. 하지만 이 역시 모든 운동의 기본원칙이다. 그러나 지난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0-5. 한국 입방아들이 조용할 리 없다. 동네 축구니 어쩌니 하면서 감독 교체론도 불거져 나왔다. 한국인 감독이었다면 벌써 쫓겨났다. 지난 월드컵 때 차범근 감독을 생각해 보라. 차 감독은 세계적 스타다. 그를 키워준 유럽 무대, 그것도 축구 제전이 열리는 마당에서 그를 쫓아낸 게 한국이었다.

그가 혼자 공항으로 돌아오는 쓸쓸한 뒷모습에서 우리는 진작 한국을 읽어야 했다. 몇 안 되는 세계적 인물을 이렇게 대접하다니.

히딩크 감독은 교과서대로 했다. 그뿐이다. 오직 기본과 원칙에 따라 했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 풍토에서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히딩크 감독이 위대한 건 그래서다. 그리고 그의 카리스마, 훈련의 강약 조절, 유머, 재치 있는 어록, 선수를 껴안는 포용력, 따뜻함, 이 역시 그의 전유물이 아니다.

▼알고도 못한 어리석음▼

이런 인간적 자질은 어느 분야에서든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이다. 그리고 주위에서 그렇게 키워야 한다.

이렇게 따져보면 히딩크 연구라는 말부터가 우습다. 그런 정력이 있거든 축구교과서를 한 번 더 읽어보기를 권한다.

우리가 느껴야 할 것은 알고도 못한 어리석음과 부끄러움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원칙을 지키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연구해야 할 대상은 히딩크 감독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뻔히 알면서 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분석해봐야 한다. 이게 우리가 연구해야 할 당면한 과제다.

어디 축구만의 일이랴. 정상으로 가는 길은 의외로 간단하다. 원칙대로 하는 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다. 그리고 이게 세계로 통하는 길이다.

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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