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韓다르크’의 골프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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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25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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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한명숙(韓明淑) 씨가 국무총리로 재임할 때 경기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미군기지 예정지에서 철조망 설치작업을 하던 군이 시위대와 충돌했다. 시위대 수백 명이 절단기로 철조망을 뚫으려고 시도했다. 수도군단 특공연대 소속 병사들은 이를 저지하다 시위대가 휘두른 죽봉에 얻어맞아 뇌진탕 각막장애 안면골절상 같은 중상을 입었다.

한 총리는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2일 발표한 대(對)국민 호소문에서 ‘시위대와 경찰 정부당국, 이 모든 당사자가 한 걸음 물러나 냉정을 되찾자’고 말했다. 대추리의 미군기지 사업은 의회를 통과한 안보 관련 국책사업이었다. 좌파단체 회원들에게 젊은 군인들이 무차별 폭력을 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명색이 국무총리가 군경과 폭력시위대를 동일선상에 놓고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펼친 것이다.

1심 무죄판결로 지지율이 오른 한 전 총리가 민주당 서울시장 경선 참여를 선언했다. 그의 ‘출마 선언문’은 천안함 순국장병에 대한 국민적 애도 분위기를 의식한 듯 4년 전의 ‘대국민 호소문’과는 톤이 다르다. ‘조국의 바다를 지키다 순직하신 천안함 영령들에게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저 또한 자식을 둔 어머니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낍니다.’ ‘대국민 호소문’과 ‘출마 선언문’에서 느껴지는 혼란스러운 간극을 서울시민이 어떻게 판단할지 궁금하다.

부실수사 별건수사가 1등 공신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뇌물 5만 달러를 받은 혐의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은 예견(豫見)된 결론이었다. 검찰의 핵심 증거인 곽 씨의 진술은 법정에서 오락가락했고 달리 보강증거도 없었다. 하지만 법정 공방에서 드러난 몇 가지 사례는 사건의 본질과 직접 관련이 없는 정황 증거라고 할지라도 한 씨의 공직윤리와 관련해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한 씨는 여성부 장관 시절 곽영욱 당시 대한통운 사장에게서 골프채를 선물로 받았다는 검찰 주장에 대해 “골프를 치지 않는다. 성의로 받겠다”며 모자 하나만 들고 나왔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골프채를 사양하고 골프 모자만 집어 들었다고 인정하더라도 장관이 수요일 근무시간에 법정관리 기업의 사장과 함께 골프숍에 간 행위는 공직자로서의 기본자세를 의심받을 만하다.

석탄공사 사장직에 응모했던 곽 씨는 2006년 12월 20일 총리 공관에서 정세균 당시 산업자원부 장관, 강동석 전 건설교통부 장관과 함께 점심을 하고 나서 석공 사장은 떨어졌지만 한국전력의 자회사 사장이 됐다. 한 총리는 같은 날 저녁에는 건설업자 세 명을 초청해 공관에서 저녁을 들었다. 이 중에 H 씨 등 두 명이 한 전 총리의 지역구(경기 고양)에서 사업을 하던 업자였다. 검찰은 한 전 총리가 H 씨로부터 9억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를 공표해 별건수사 논란이 일었다.

한 총리의 점심 저녁 자리에 초대받은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건대 그를 ‘서민 후보’라고 추어올린 사람들의 얼굴이 뜨거워질 것이다. 유죄인지 무죄인지는 최종적으로 대법원이 가려주겠지만 5만 달러나 9억 원 공방이 그냥 불거진 게 아니다. 역대 총리 중에 이렇게 주변 관리를 소홀히 한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싶다.

한 전 총리는 ‘검찰이 허위 피의사실을 누설했고, 동아일보는 이를 근거로 6건의 기사를 실어 명예를 훼손했다’며 법무부와 동아일보를 상대로 각각 1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렇다면 국회의원 장관 국무총리를 지내고 제1 야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겠다는 공인(公人)의 수사와 재판을 언론이 눈감고 있으라는 말인가. 언론은 검찰의 수사와 기소, 법정공방은 물론이고 판결 결과까지 소상하게 보도해 국민의 판단자료로 제공할 책무가 있다.

냉각효과 노린 10억 원 소송

기사와 관련한 소송으로 언론의 후속 보도 기능이 위축되는 것을 냉각효과(chilling effect)라고 한다. 한 전 총리는 동아일보 6건 기사에 10억 원의 손해배상금을 요구했으니 한 건에 약 1억6700만 원꼴이다. 5만 달러 수수 혐의 수사 때는 조선일보와 정부 등을 상대로 40억 원 손배 소송을 냈다.

한나라당의 김성식 남경필 의원은 “검찰이 한 전 총리를 잔다르크로 만들고 있다”며 9억 원 수사의 중단을 촉구했다. 검찰도 지방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안팎의 판단에 따라 이 사건 수사와 기소를 지방선거 이후로 미룰 모양이다. 한 씨가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후 법정에서 금고 이상의 유죄판결이 확정될 경우 시장직을 상실하게 돼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처음으로 서울시장 보궐 선거를 해야 할 판이다. 그가 제1 야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결정된다면 6월 2일 투표장으로 가는 서울시민도 그를 찍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스러울 것이다. ‘부실수사’와 ‘별건수사’로 죽을 쑨 검찰이 한 씨를 띄운 1등 공신이고, 이 모든 혼선의 단초를 제공했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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