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북핵 이후

  • 입력 2004년 10월 13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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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이후’에도 한반도를 뒤덮는 기류는 소용돌이치면서 시곗바늘은 100년 전으로 돌아갈 것 같다. 베이징 6자회담도 불투명한 상태인데 ‘북핵 이후’란 상정은 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최근 한반도 주변 국가들의 미묘하게 움직이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북핵 문제 해결까지는 우여곡절을 겪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매듭지어질 것이란 전제에서다. 국가에 따라 한반도 출신 상당수로 구성된 특수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는 말까지 들린다. ‘북핵 이후’ 전개될 한반도 상황에 대처하는 전략을 은밀히 손질하고 있다는 뜻 아닌가.

▼역학관계의 지각변동▼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에 ‘북핵 이후’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더 커질 것이다. 관심사는 앞으로의 상호관계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손을 잡을 경우 ‘선남후북(先南後北)’ 관계는 유지될 것인가. 지금같이 한미, 한일간에 냉기류가 계속된다면 남북에 대한 등거리원칙을 내세우거나 북이 남에 앞서는 일은 없겠는가. 어떤 경우든 기존 역학관계의 지각을 뒤엎는 일대 변화를 각오해야 한다. 지난날 동맹관계에 기댈 처지가 못 된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일본은 이미 미국과 더욱 단단하게 짝을 지었지만 우리와 미일과의 고리는 반대로 허술하게 풀리고 있지 않은가. ‘자주외교’의 호기가 왔다고 환호하기 전에 솔직히 ‘고립무원’의 처지를 한탄해야 할 시기가 올지 모른다. 얼핏 둘러봐도 ‘북핵 이후’의 바깥 사정은 어지럽다. 과연 그때의 대비책은 있는가. 지금 같아서는 앉아서 당하겠다는 모습뿐이다.

‘북핵 이후’의 높은 파고는 안으로도 세차게 밀려올 것이다. 남북관계의 변화는 물론이고 정작 걱정스러운 것은 남쪽에서 벌어질 남남갈등이다. 만일 핵문제가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됐을 때 북한이 눈을 돌릴 곳은 어디겠는가. 그동안 다져진 ‘친북좌경’ 분위기 속에 여건이 성숙했다고 판단한다면 북측의 대남공세는 얼마나 집요하고 치열하겠는가. 1980년 조선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김일성은 대남관계의 기본으로 반공정책과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 등을 내걸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북쪽은 그대로인데 남쪽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최근 합의로 미군 철수시한이 3년 연장됐다고는 하나 사실상 미군 철수는 시작됐으며 국가보안법은 남쪽 집권세력이 폐지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상태다. 여론의 저항에 움찔하는 모습이지만 국보법 폐지는 집권 여당이 밀어붙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런 가운데 남한사회는 잇단 심각한 갈등 속에서 좌우로 갈라지고 말았다. 국보법이 폐지됐을 때 지하에 숨었던 친북 인사들이 밖으로 나와 김정일 위원장에게 환호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때의 사회 내부 갈등은 벌써 눈에 선하다. 결국 우리에겐 ‘북핵 이후’ 상황이 이미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민족공조’란 북의 주술에 말려 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있지 않은가. 이러니 ‘좌파’란 소리를 듣는 것이다. ‘색깔론’이라고 하지만 어디 색깔론으로 가려질 일인가. 스스로 드러낸 색깔을 칠했다고 우기는 격 아닌가. 이 판에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북핵 문제 해결 논의를 위한 남북정상회담 추진’ 발언은 무슨 연유인가. 지금까지 정부 방침은 ‘북핵 문제 해결 후 검토’였는데 정상회담 조건에서 북핵 문제의 선후가 달라졌다는 말인가. 핵심은 북한이 북핵 문제 해결의 보따리를 풀겠느냐다. 그렇게 믿는단 말인가. 북측의 ‘민족공조’ 구호는 남측의 감상적 민족주의를 부추기려는 당의정인 줄 왜 모르는가. 결국 ‘큰 장사’는 미국과 벌이고, 남측 제안에는 ‘하는 척’ 시늉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시점의 정상회담이 국내정치용 효과는 얻을지 몰라도 엄청난 사회적 혼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혼란을 자초하는 정권▼

문제는 북측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 남측만 속절없이 달라졌다고 안달하면서 ‘북핵 이후’ 상황에 스스로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사활의 도전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밖으로는 무력하기만 한 정권은 안으로만 앞장서 문을 열고 있다. 사회를 이처럼 불안스럽게 한 정권은 없었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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