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장소원/수능시험이 전부인가

  • 입력 2003년 11월 4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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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제 돋보기 껌 포크 휴지 떡 엿…. 전혀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없는 물건들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이들이 한자리에서 어울리는 날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수험생들을 위한 합격 기원 선물의 목록이기 때문이다.

오늘 전국 각지에서 66만여명의 학생들이 대학입학을 위한 시험을 치른다. 근래 들어 예외가 생겨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출신 대학이 취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니 오늘의 시험이 이들의 진로에 매우 중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 ‘孔子’를 ‘맹자’로 읽는 학생들 ▼

TV와 신문 잡지를 가릴 것 없이 모든 매체에서는 한 달 전부터 시험 당일의 기상을 예측한다. 올해는 다행히 시험 당일 한파가 없다지만, 전래의 ‘입시한파’라는 말이 ‘수능한파’로 바뀌어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됐으니 이 단어는 이제 사전에라도 올라야 할 지경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험생들을 대상으로 컨디션 유지하는 법, 스트레스 극복법, 최종학습 전략 등 각종 정보가 쏟아진다. 인터넷을 통해 시험 운을 알아보는 것이 유행이고 ‘XX거사 신령부적’이라는, 휴대전화용 신종 부적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온 나라가 들썩이는 것이 어찌 시험 당일뿐이랴. 사실 우리나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수험생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입시철이 아니어도 매일 아침 집어 드는 신문이 예외 없이 묵직한 것은 그 전날 일어났던 각종 사건, 사고의 양 때문이 아니라 신문 속에 들어 있는 전단지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전단지의 반 이상을 각종 학원 광고가 차지한다. 영어유치원에서 시작해서 피아노, 글짓기, 그림 그리기, 태권도 등 초등학생 대상의 특기학원, 거의 학교 수준의 규모를 자랑한다는 입시학원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사교육 시장이 아침마다 눈앞에 펼쳐진다.

자녀들에게 이렇게 엄청난 사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우리의 부모들이다. 내 주변만 보더라도 초등학생인 자녀가 밤늦게 귀가한다고 가슴 아파 하면서도 남들이 다 하니 따라서 과외를 시킬 수밖에 없다는 부모가 많다. 이들은 자식이 고등학생이 되면 아예 새벽까지 자식의 공부방을 지키곤 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입시가 가까워 오면 학부모들은 백일기도를 올리고 종교단체들은 수험생들의 선전을 기원하는 각종 행사를 개최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넘치는 사교육의 혜택을 받은 우리의 자녀들에게서 바람직한 대학 신입생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대학 안에서 이들을 바라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면접시험을 치르러 온 학생에게 한자로 쓰여진 ‘공자(孔子)’를 읽어 보라고 했더니 ‘맹자’라고 읽어 허탈했던 기억이 있다. 요즘의 사교육은 한자교육까지는 커버해 주지 않는 모양이다. 몇 년 전 논술시험이 있었을 때 작문을 한 학생들이 한결같이 예로 든 속담이 있었으니 바로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평소에는 들어보기 힘든 말이었다. 그 때문에 채점하던 교수들이 채점실에 지린내가 진동한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틀림없이 학생들이 받았던 논술과외 모범답안에 이런 속담을 인용해 작문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논술과외를 통해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이 같은 획일적 사고와 정답 기술에 불과했던 것이다.

▼사교육, 답안작성 기계로 만들어 ▼

무사히 대학에 들어온 신입생들에게서 창의성과 자주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학국어 시간에 자신의 애송시를 하나씩 골라 암송하고 그 시가 왜 좋은지 논리적으로 설명해 보라고 했더니 “이 시는 우리 엄마가 좋다고 골라 주셨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학생을 보면 저절로 혀를 차게 된다. 사정이 이쯤 되고 보면 10여년간 공들여 온 부모의 교육열이 독립적인 성인이 돼야 할 자식을 미숙아로 남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강남 집값 상승이 교육문제 때문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스스로 ‘맹모삼천(孟母三遷)’의 길을 가고 있다고 믿고 있는 학부모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 말의 참뜻은 대학 진학률이 높다는 소문을 좇아 이리저리 입시학원을 옮기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공자’를 ‘맹자’로 읽고 엄마가 골라 준 시를 자신의 애송시로 내세우는 아이에게 맹자와 같은 인물이 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장소원 서울대 교수·국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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