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송호근/오늘, 마음을 결정하자

  • 입력 2002년 12월 17일 19시 10분


오늘이 가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하리…. 어느 노시인(老詩人)의 순애보적 고백이 궤도를 이탈한 레코드판처럼 쟁쟁거리면서 결심을 요구한다. 사랑한다고 발설하는 것조차 불경스러울 정도의 사랑이라면 얼마나 행복하랴. 그런데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모자라 이것저것 재고도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오늘, ‘당신입니다’라고 작심해야 하는 괴로움이란! 이런 때는 자신의 선택만이 역사의 진로를 바꿀 것이라고 굳건히 믿으며 결재하듯 ‘붓도장’을 찍었던 90년대의 선거가 그립기도 하다. 민주화의 절대명제 앞에 회의는 없었다. 절대적 외환위기 속에서 선택의 여지는 넓지 않았다.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내일이면 영원히 사라질 양 김씨에게 모종의 채무의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도 ´흔들리는 票心´ 많아▼

그러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카리스마적 인물에 물들었다. 양 김씨가 사라진 무대에서 그들의 공과를 재단하고 그들의 부재를 채워줄 도덕적 카리스마는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 테크노크라트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종말과 개막의 경계에서 결심을 유보시키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 중이다.

들을 것 다 듣고, 볼 것도 열심히 보았다. 각계의 엇갈리는 평가들을 주의 깊게 측정하기도 했고, 마치 대가족 사진을 들여다보듯 유력 후보와 각 진영의 장수들을 한데 묶어 청사진을 인화해보기도 했다. 보수와 진보의 중간에 서서 한국사회가 무엇을 더 필요로 하는지도 생각했다. 부유(浮遊)하는 선택을 착지시킬 필연적 명분을 찾아 지난 시간과 미래의 시간을 대조했다. 그런데 후회의 징후를 숨기지 않은 결론은 쉽지 않다. 오늘이 가기 전에…. 결심을 재촉하는 이 간단한 권고를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유난히 부동층이 많은 이번 선거, 결심을 했다 해도 번복할 수 있다는 사람까지 합하면 30%에 이른다. 대체 후보들은 왜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했는가. 아니면, 유권자들은 왜 흔연히 마음을 주지 못하는가. 부유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말(언어·言語)들이 난무하고 있는가. 열광과 설렘? 이것이라면 행복한 투표가 될 터인데, 그건 아니고, 미련? 연연해할 것은 더 이상 없는 듯하고, 불안? 이게 다수의 유권자들이 느끼는 공통된 정서인 듯도 하다. 아쉬움과 불안이 그 전에도 아주 없었던 게 아니라면, 그래도 조금은 더 미더운 후보에게 흔쾌히 표를 던질 수는 있을 터인데 말이다. 그래서 이번 선거는 이래저래 ‘선택의 열광’보다 다른 후보를 차단하는 일종의 ‘저지 투표(negative voting)’가 될 공산이 크다.

그런데 무엇을 저지할 것인가. 저지로 인해 발생할 어떤 리스크도 감당할 각오는 되어 있는가. 이런 물음들이 역대 어느 선거보다 더 신중해진 부동층의 결심을 방해하고 있다. 정작 유력 후보들간 정책 간격이 넓어지자 유권자들의 심적 부담은 한층 증가했다. 정책 영역에 따라 진보와 보수를 적절히 구사하는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이번 선거는 분명 선택을 강요당하는 측면이 많다. 누가 승리하든, 전열을 재정비한 집권 여당이 진보정치 방식과 예기치 못한 결과의 관리를 둘러싸고 재분열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안정’을 내건 거대 야당이 사안에 따라 U턴을 시도할 수도 있다. 더욱이 표면적으로는 ‘지역감정’이 숨죽이고 ‘세대정서’가 전면에 부상한 것도 ‘저지’의 또 다른 심적 부담이다. 변화무쌍한 젊은 세대의 자유주의에서 미래개척의 에너지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전통적 요소와의 무한 투쟁으로 비치는 것이 기성세대에게는 내심 미덥지 않다.

▼선택 아닌 저지를 위해서라도…▼

그러나, 이제 결심해야 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처럼, ‘마지막으로 무책임을 받아들이는’ 심정으로. 과거의 그들은 우리의 기대를 결국 저버렸음을 새삼 기억한 때문이 아니라, 정치인들의 집권 의도에 우리들의 주권이 동원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기에. 그래도 정책과 이념의 선명성 경쟁이 일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만 한다면. 내일이면 탄생할 새 지도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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