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은 버리고 가자]최윤/꼴찌는 설땅없는 나라

  • 입력 1999년 12월 26일 21시 08분


인간의 개별적 가치가 이토록 공적으로 주장된 세기도 없는 듯하다. 그런 만큼 뛰어난 개인에 대한 예찬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신화적으로 각색되는 시대이기도 했다. 어떤 분야이건 최고는 아름답다는 구호는 누구나 유혹한다.

특히 짧은 근대의 역사를 가지고 단시일 내에 세계시장에서 ‘튀어야’ 했던 우리의 경우 이례적인 최고 개인의 생산은 매우 효과적인 지름길이라, 늘 최고 만들기는 누구나의 초미의 관심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고에 대한 갈증이 제도에도 은근슬쩍 반영되고, 어떤 것은 전국민적인 부담이 되기도 하며 몇사람만 모이면 좌중에서 ‘왕년에’를 들먹거리더라도 자신이 최고임을 밝혀야 말발이 선다. 약간 높다 싶으면 직위명도 과장되어 붙여진다. 체육계에는 미안한 말이지만 일례로 훈련사라는 뜻의 코치라는 단어가 어느새 이름도 엄청난 지도자로 변신한 것도 의미심장한 문화의 표시다.

▼1등이라야 행세▼

최고가 한 사회의 이념이 되었을 때 최고에 대한 맹목적 선호는 최고 콤플렉스를 형성한다. 최고가 구호가 되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소망사항의 표현인 경우가 많으며, 무언가가 최고로 인구에 회자될 때 이미 더 이상 최고가 아닌, 속도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최고 콤플렉스는 자신의 노력의 잣대를 타인이 알아주는 것에 두는 것도 비생산적이지만 그것이 새 세기에는 제발 종식되었으면 하는 유해한 콤플렉스가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단시일 내에 쉽사리 만들어지는 크고 작은 최고들의 자리나 가치가 상대적이고 순환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완강한 고집에 있다. 그 고집이 또한 일인자적 고매함의 표현인 듯, 사회의 통념이 그것을 권위적으로 용인할 뿐만 아니라 부추기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치외법권의 최고가 많다. ‘위대한 정신은 서로 만나기 마련’이라는 속담도 있는데, 우리의 최고의 일인자들은 서로 만날 줄을 모르고 서로를 폄훼하는 사소한 전쟁을 벌이는 데 아까운 정열을 소비한다. 그렇게 반영구적인 최고와 일인자가 형성된다. 최고가 되는 데 다소간의 각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투기적으로라도 무조건 최고를 지향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더불어 살기 더 중요▼

세기의 막바지를 못 견디고 IMF체제를 겪는 것이 환골탈태를 위한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그 파국을 통해 값비싸게 습득할 수밖에 없었던 국제감각이, 좁은 우물 안의 최고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최고가 쉽사리 될 수 없다는 것을, 최고 위에는 최고가 있으며 그 자리는 한시적임을, 또 무엇보다도 최고는 무수한 사람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막연히나마 인식하게 했으니, 실제 외국 기업이 ‘같이 일하는 것에 습관이 되지 않은 힘든 파트너’로 외국에 나가 있는 우리 인력을 평하는 것을 종종 듣는데, 이는 공동의 삶을 희생해서라도 최고를 지향해온 최고 콤플렉스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구조가 실력 위주로 편성되고 부서장 대신 팀장으로 이름과 옷이 바뀌어도 더불어 같이 사는 사회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최고 콤플렉스를 대신하지 않는다면 그 효과가 긍정적인 빛을 발하기 어려울 듯하다.최윤(소설가·서강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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