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김상근]부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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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러시아에 다녀왔다.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최악의 폭염이라는 섭씨 39도의 모스크바 거리를 걸으며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곳은 공산주의를 선택했던 20세기 러시아인의 실험이 완전히 폐기된 자본주의의 활기찬 대로였다. 실험은 러시아인이 하고 이념 갈등의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몫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한국에 온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오호통재라!

우리는 도스토옙스키를 최고로 치지만 기실 그 나라 사람은 푸시킨과 톨스토이를 러시아 문학의 최고봉으로 받들었다. 러시아 혁명의 씨앗을 뿌렸던 데카브리스트들과의 우정과 미모의 아내를 가졌기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푸시킨은 격동적인 삶과 장엄한 서사시로 명성을 떨쳤고, 톨스토이는 성자와 같은 삶과 성서와 같은 문학을 통해 러시아인의 영혼을 매료시켰다.

문득 10대 때 읽었던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책이 생각나 사 두었다가 모스크바에서 다시 읽었다. 제목부터 새삼스러웠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가 아니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사람됨의 본질을 묻는 책이다. 처세에 대한 방법론이 아니라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이명박 정부의 친서민 정책과 일부 대기업의 천문학적 수익에 대한 보통 사람의 관심이 맞물려 부자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다. 톨스토이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던졌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 부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답변을 거의 강압적으로 요구한다.

부자 좇는 세태에 근원적 물음

솔직히 부자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부자가 되는가?”에서 출발했다. 이 세상의 모든 갑돌이와 갑순이는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부자가 되는 방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부자학(富者學) 학회가 구성되어 있다고 들었다. 놀랄 일도 아니다. 부의 불균형이 심화되면서 우리는 “어떻게 부자가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잠시 뒤로 미루고 “부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으로 부자에 대한 관심을 이동시켰다.

부자학이 인간의 욕망을 긍정적으로 대변한다면 이른바 부자의 윤리학은 이상주의적인 평등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소득에 따른 차별적 누진과세를 주장하거나 더 많은 사회적 기부를 부자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부자에게 필요한 “부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해답은 제기되지 않았다.

부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먼저 질문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부자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존재 이유의 당위성을 묻는다.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부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가난한 구두 수선공 가족을 통해 인간의 존재 이유를 발견했던 천사 미하일과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다.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서로를 위하는 사랑의 마음 때문에 인간성이 유지된다는 것이 소설의 핵심이다.

소설에 부자가 등장한다. 이 부자는 외국에서 구한 비싼 가죽을 미하일에게 맡겨 최고의 장화를 만들라고 주문했다. 지상에서 구두 수선공이 된 천사 미하일은 그날 죽게 될 부자의 운명을 알았고, 주문한 장화 대신 그의 장례식에 사용될 시신용 슬리퍼를 만들었다. 톨스토이는 이 우화를 통해 그 부자가 정작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몰랐다”고 차분하게 지적한다.

톨스토이에 의하면 부자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 때 존경받으며 살아갈 존재의 이유를 확보하게 된다. 지금이야 빌 게이츠가 세계 최고의 부자겠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부자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Medici) 가문이었다. 이 가문의 사람들은 유럽 최고의 부를 축적했고 16세기 교황을 2명이나 배출했으며 프랑스 왕실에 두 명의 딸을 시집보내 왕족 가문이 되었다.

한국의 메디치家는 언제쯤

겉으로 보이는 이런 화려함이 메디치 가문의 위대함을 증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메디치 가문의 사람은 길거리에서 조각하고 있던 무명의 미켈란젤로를 양자로 영입하여 세계 최고의 예술가로 길러냈고, ‘플라톤 아카데미’를 부활시켜 새로운 사상과 시대의 후원자가 됨으로써 가문의 이름에 빛나는 명예를 남겼다. 메디치 가문의 부자는 자식에게 주식과 부동산을 남긴 것이 아니라 명예로운 가문의 이름을 남겼고, 사람들은 메디치란 위대한 이름 앞에서 모두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

그렇다. 부자는 이름으로 산다. 부자가 이름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살 때 우리는 그들 앞에서 모자를 벗을 것이다. 톨스토이와 메디치 식으로 말하자면 부자에게 필요한 점은 가문의 이름이 담고 있는 명예여야 한다. 부디 이씨 정씨 구씨 최씨 가문이 포함된 이 땅의 부자들이 이 칼럼을 읽었으면! 그 양반들이 모두 미래 한국의 메디치가 되어 준다면!

김상근 연세대 교수·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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