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한미화]10년 전 어떤 책 읽었나요

  • 입력 2008년 11월 15일 02시 58분


집으로 돌아오는 길, 1L짜리 맥주를 하나 사 들고 올라왔다.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건만 주위는 어둑하고 바람이 불어 낙엽은 갈 곳을 모른 채 흩어졌다. 10년 전 생각이 났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출판사는 구제금융 한파 때문에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처음에는 명퇴자를 모집했고 이어서 감원 계획을 발표했다. 아주 구체적으로 팀별 감원 인원까지 제시됐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아니면 동료가 회사를 나가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자 신열이 오른 듯한 흥분상태가 이어졌다. 그때만큼 팀원이 자주 모여 술을 마셨던 적이 없었다. 당시 우리는 밤에는 울분을 참지 못하거나 단합을 핑계 삼아 술을 마셨다. 낮에는 담배를 핑계로 삼삼오오 옥상을 들락거렸다. 구조조정 바람이 세차게 불던 그해 겨울, 나 역시 회사를 그만뒀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다. 2년 넘게 고정으로 출연했던 문화프로그램을 녹화하러 갔다가 갑자기 프로그램이 없어지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제 사정이 악화되며 방송사 광고 사정이 나빠지자 제일 먼저 문화 관련 프로그램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는 얘기다. 술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오다 보니 10년 전 생각이 났다.

최근 국내 상황이 구제금융 시절과 똑같이 흘러간다는 사실이 공포스럽게 다가온다. 짐작은 했지만 명퇴자를 모집하거나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 ‘올 것이 오고’ 있다. 출판계 역시 다를 바 없다. 내로라하는 출판사들이 구조조정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책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아우성이고, 온라인 서점의 매출도 30% 이상 감소했다는 소식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출판은 불황기에 강하다는 믿음이 있었다. 일본의 경우 독자들이 책을 읽는 수요는 경제 환경과 정반대라는 게 정설이었다. 경기 침체기에는 돈이 많이 드는 여행이나 문화 활동비를 줄이고, 대신 독서를 통해 어려운 현실의 해법이나 삶의 방향을 찾으려는 욕구가 강했다. 영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초반 영국이 전후 최대의 경기 후퇴기를 맞이했을 때도 다른 산업에 비해 출판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런 믿음은 모두 좋았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닐까. 2000년대로 접어들며 출판의 환경이나 독서습관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이제 독자에게 책이란 문학과 인문과 실용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이른바 실용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내게 꼭 필요한 책, 곧바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니면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거니와 당장 필요하지 않은 책을 읽을 마음의 여유도 없어 보인다. 여기에 인터넷과 게임 등 대체 가능한 오락거리가 차고 넘친다.

책을 읽는다고 반 토막이 나 버린 펀드가 제자리를 찾을 리 없고 구조조정을 피해 갈 묘책도 없다. 하지만 인간이란 뜻하지 않은 혼돈에 직면하면 처음에는 허탈감으로 현실을 부정하고 분노를 겪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변화를 인정하고 통찰과 지혜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10년 전, 베스트셀러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독자도 마찬가지였다. 구제금융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1년 후 독자들은 ‘한국, 한국인 비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등 현실에 대한 냉정한 비판과 인식을 요하는 책뿐 아니라 ‘낯선 곳에서의 아침’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오체불만족’ 등 시련을 극복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아 읽었다.

책은 원래 효과가 늦게 나타나는 미디어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이 변하기도 하고 혁명에 눈을 뜨기도 하니 이보다 더 파급력이 큰 미디어도 없는 셈이다. 아마도 혹독한 겨울이 우리를 기다릴 듯하다. 이 겨울, 책을 통해 미래를 준비해 보자.

한미화 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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