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한기호]‘학진’의 인문학살리기 문제 있다

  • 입력 2008년 7월 26일 03시 01분


인문학을 살려내야 한다는 인문학자들의 외침이 2006년 가을에 들불처럼 일었다. 학자들이 인문학 위기의 주범과 해결사로 정부를 지목한 것은 일단 주효한 듯하다. 당시 교육인적자원부가 인문학 진흥계획을 발표하고 ‘인문한국 프로젝트’를 비롯해 향후 10년 동안 4000억 원을 한국학술진흥재단을 통해 투입하기로 결정했으니 말이다.

그중 인문한국 지원사업은 24개 대학 30개 연구단을 선정해 1000억 원을, 인문저술 지원사업은 매년 상당수의 학자를 선정해 연 1000만 원씩 3년간 모두 3000만 원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이런 일이 과연 인문학을 살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아직 사업 초기라 성과를 좀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출판생태계를 파괴하는 데는 상당한 기여를 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역사분야를 살펴보자. 한국역사연구회가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고구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처럼 생활사를 다룬 교양서를 연달아 내놓던 20세기 말만 해도 대중역사서 시장이 곧 만개할 것처럼 여겨졌다. 수십만 권이 팔린 ‘조선왕 독살사건’의 이덕일 씨처럼 베스트셀러 저자까지 등장하면서 소장학자의 교양서 집필이 잠시 늘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학진의 프로젝트가 작동하면서 ‘프로젝트형’ 학자는 늘어나도 교양서를 펴낼 수 있는 인적자원은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학자가 쓴 교양서는 가뭄에 콩 나듯 하고 있다.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 미처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글 쓰는 능력이 있어 교양서를 펴낼 만한 젊은 학자는 프로젝트에 수렴된 다음부터 어떻게든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남기에 급급해졌고, 따라서 논문형 글쓰기에 바쁘다. 논문형 글쓰기로는 대중독자를 사로잡을 수가 없다. 하물며 펜과 종이보다 마우스와 스크린에 익숙한 젊은층을 유인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학진의 연구지원이 인문학 진흥에 제대로 기여하려면 모든 국민이 성과물을 폭넓게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손쉬운 길은 연구 성과를 책으로 펴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성과물은 글을 다시 쓰지 않고서는 책으로 펴내기 힘든 수준이어서 출판기획자가 출간을 기피한다. 애써 세금을 들여 젊은 학자의 피땀까지 팔아 만든 성과물이 창고에 처박히게 되는 셈이다. 이 사업이 성공하려면 공모할 때부터 출판 계약서를 첨부하도록 요구하고 실제로 책 출간을 의무화해야 한다.

학진의 다른 진흥사업이 지닌 문제점도 지적해 보자. ‘명저번역지원사업’은 목록선정의 공정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책 출판을 한 출판사로 몰아주는 방식이어서 명저 번역에 뜻을 가진 출판사나 번역자의 자발적 참여를 원천적으로 막는다. 학술지를 골라 ‘등재지’라는 레테르를 안겨주는 사업도 대부분의 등재지가 내용의 참신함보다는 논문형 글쓰기만을 암묵적으로 강제하므로 발랄한 글쓰기를 봉쇄한다.

인터넷 등장 이후 무료 정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대중은 누구나 알아야 할 상식을 소재로 하되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이 결합한, 매우 설득력 있는 글을 필요로 한다. 오랜 연구로 농익은 글을 쓸 줄 아는 학자들이 대중서 집필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현실은 학자가 프로젝트라는 참호에 숨어 대중과 거리두기에 더 열중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인문학자의 외침은 인문학 진흥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눈먼 돈’을 뜯어내는 데 있었음을 증명해 보인 셈이다. 이러고서야 어찌 인문학이 진흥될 것인가. 하루빨리 지원 시스템을 근원적으로 혁신해야 마땅하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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