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황선미]앞산의 죽음이 나를 슬프게 하네

  • 입력 2008년 4월 12일 02시 50분


여행을 좀 길게 하고 왔더니 앞산이 사라져버렸다. 유리창에 황사 먼지가 누렇게 앉아 착각을 일으켰나 했다. 아니었다. 철마다 다른 색으로 눈을 시원하게 하던 바로 그 작은 동네 산이 정말로 벌겋게 뭉개졌다. 동네 산이 되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을 그 산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다니. 가슴이 시렸다. 나도 어서 여기를 떠나야 할 것처럼 위기감이 들었다. 어렸을 때 내가 사랑했던 들길 모퉁이의 패랭이꽃 생각이 또 났다. 길이 똑바로 나는 바람에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수줍은 꽃. 나는 어렸지만 패랭이꽃의 죽음이 어이없었다. 초여름에 빨간 꽃잎을 잠깐 보여 주려고 살았던 작은 꽃까지 없애야 했나.

동네 대학 캠퍼스의 작은 동산 생각도 났다. 즐비한 밤나무와 도토리나무 사이로 가면 우체국이 있는 동산 때문에 나는 이 동네에 살기로 마음을 굳혔었다. 바람소리를 느낄 수 있고, 바람에 나뭇잎이 움직이는 걸 바라볼 수 있고, 청서 등 다람쥐와도 장난칠 수 있었던 자연스러운 숲이었던 것이다. 그 숲이 난도질당했을 때도 나는 참 슬프고 화가 났다. 크고 좋은 나무들로 멋지게 꾸며졌으나 내 눈에는 잔잔한 아름다움과 삶의 여유가 유린된 처참한 몰골이었다. 숲을 떠나 버린 다람쥐와 새들처럼 나도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멀찌감치 있던 앞산마저 사라진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마음을 걸어 두고 살 데가 없다.

피곤이 안 풀렸는데도 등산을 갔다.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비 오면 진달래가 다 진다고 성화부리는 동생을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진달래를 보자면 꼭 이맘때 길을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알기 때문이다. 진달래라면 이 허전함에 보상이 되리라. 겨울이 혹독한 만큼 고운 빛으로 드러나서 메마른 바람에 상할 때까지 산을 증거하는 꽃. 이 꽃에는 이상하게 가슴이 설레고 울컥해진다. 우리에게 이만큼 사무치게 예쁜 꽃이 또 있을까.

아직 진달래가 남아 있었다. 그 화사함이 감사하고 기특했다. 산이 뭉텅뭉텅 잘려 나가는 판에 여전히 제가 누구인지 잊지 않고 피는 꽃. 이제 우리는 진달래를 보려면 피곤을 무릅쓰고 교통체증을 감수하며 기어이 사진에 박아두고 말리라 준비를 하고 나선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 느긋하게 즐기며 마음으로 느낄 여유가 없다. 우리는 너무 바쁘고 자연에 속한 것들은 너무나도 빨리 사라져 버리기에.

‘떨어진 꽃잎이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잠을 자네./아무도 쓸지 않은 지 오래//산그림자가 이불을 내려/그의 몸을 덮어주네.//비가 비를 때리는 밤에도’(이성선 ‘떨어진 꽃잎’)

마음으로 기원했다. 진달래야, 부디 여기 오래 있어라. 우리 곁에서 영원해라.

여행지에서 가장 부러웠던 게 도시의 녹지였다.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녹지와 오래된 것들이 함께한 풍경. 손대지 않은 듯하지만 사실은 세심한 배려와 자긍심으로 조화를 이룬 결과들일 터였다. 그것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내내 부럽고 안타까웠다.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산이 없어진 걸 보다니.

나는 어려서 잃은 패랭이꽃을 잊지 못한다. 작은 동산에 살던 다람쥐와 새들의 사라짐도 두고두고 슬프다. 나중에 앞산이 사라진 일도 아파할 것 같다. 내가 너무 사소한 것에 연연하나. 우리가 죽음을 슬퍼하는 건 다시는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을 그리워하고 파괴되는 걸 안타까워하는 건 거기가 바로 우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결국 다람쥐와 새처럼 산에 깃들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돌아갈 곳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뿌리인 고향을 유린하고도 슬픔을 모른다면 우리가 과연 사람인가.

황선미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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