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방민호]번역은 창조다

  • 입력 2006년 7월 26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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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가서 그곳 문학인들을 만나면서 한국문학을 심각하게 뒤돌아본 적이 있다. 아프리카 문학이라고 하면 마치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세계 변방의 문학 같지만 정작 그런 ‘초라한’ 문학은 바로 한국문학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만 해도 아프리카는 벌써 남아프리카공화국 두 명(존 쿠체, 네이딘 고디머), 이집트(나기브 마푸즈)와 나이지리아(월레 소잉카)가 각각 한 명을 배출한 반면 한국은 아직 없다. 중국 일본과 비교해도 한국문학의 옹색함은 명백하다.

이런 상황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들 수 있다.

하나는 한국 현대문학의 중량감 부족과 시야의 협소함이다. 이 점은 작가를 비롯한 문학인들이 자성해야 할 점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한국어라는 언어와 번역의 문제다. 한국문학은 한국어로 써지는 문학이다. 그리고 한국어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한국어 사용 인구를 다 합쳐도 8000만 명 내외만이 사용한다. 그마저도 대부분은 협소한 한반도에 밀집되어 있고, 약 30%는 폐쇄적이기 이를 데 없는 북한 지역에 분포해 있다.

한국문학은 그런 고립적인 언어로 써지는 문학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훌륭한 번역 없이는 세계에 제대로 알려져 평가받을 수 없다. 이 점에서 한국문학은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문학보다 아주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다.

아프리카 문학도 모국어를 강조하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 유산으로 영어와 프랑스어로 발표되는 작품이 많다. 따라서 유럽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로 ‘직접’ 확산될 수 있다. 반면 한국문학은 번역, 훌륭한 번역 없이는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읽힐 수 없는 것이다.

지난주 한국문학번역원은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한국문학 세계화의 현실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번역을 전면에 내세운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작가와 비평가, 대학교수, 번역 관련 전문가들은 많은 의견을 내놨다. 이제 번역은 문학 작품의 번역이라는 한정된 의미에서 벗어나 ‘문화의 번역’이라는 개념적인 확장을 필요로 한다는 것, 현대문학 작품과 특히 동시대 문학의 번역에만 힘쓸 것이 아니라 고전 작품의 번역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 번역가를 일종의 노동인력으로 간주하는 낡은 인식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세계를 만들어 가는 존재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 무엇을 번역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수용자의 필요도 생각해야 하지만 무엇을 알릴 것인가에 대한 자기 척도가 필요하다는 것 등등.

이날 뇌리에 강한 인상을 심어준 것은 무엇보다 객석을 가득 채우고 심포지엄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의견을 듣고 또 의견을 내놓았던 일반 참가자의 태도였다.

대학에서 번역이나 통역과 관련된 학문을 전공하는 분들, 외국문학을 연구하고 번역해 온 분들, 현장에서 번역 사업에 종사하는 분들, 그리고 외국에 나가 한국작품 번역의 쓴맛을 톡톡히 보아 온 작가들, 한국문학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번역에 주력해 온 외국인들.

번역원이 해야 할 일이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노력과 결실이 없다면 한국문학이라는 것은 다만 한반도라는 고립된 섬 안의 문학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번역이라는 것을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창조적 과정으로 보는 것, 번역가를 단순한 기능인이 아니라 창조자로 보는 시각의 전환이야말로 한국문학번역원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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