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이기웅/모로 누운 ´문화재 인식´

  • 입력 2002년 9월 27일 18시 30분


며칠 전 나는 영국 런던의 한 뒷골목에 자리잡은 고서점 ‘프랜시스 에드워드’에 들렀다. 이 고서점은 우리가 지금 경기 파주시 교하면에 건설하고 있는 출판도시의 모델이 되었던 웨일스의 ‘헤이 온 와이’에도 지점을 갖고 있어 퍽 친근감을 가진 터였다. 이 서점에서 그 날 나는 1904년 런던에서 발행한 ‘코리아’라는 책 한 권을 사 들고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서지학적(書誌學的)으로도 이름 있는 책이라 언젠가는 구입하려는 욕심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의 필자인 앵구스 해밀턴은 1900년 무렵 영국의 기자로 일본 중국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지방에 머물면서 이 책을 집필했는데 그 당시의 조선의 풍물과 생활상 그리고 교역과 산업, 자원 등의 문제를 풍부한 사진자료로 보여주면서 설명한 귀중한 문헌이다.

▼다보탑 기울었다고 호들갑▼

어떻게 이 책이 발행된 지 1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수집가인 나 같은 이들의 구매충동을 불러일으키면서 소중하게 책방에 꽂혀 있단 말인가. 이런 책을 접할 때마다 나는 그 신기함에 놀라면서, 또한 이를 즐긴다. 이 즐거움은 마치 박물관에서 귀중한 유물을 감상하거나 한 유적지를 방문해 역사적인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고서(古書)의 낡은 종이에서 피어오르는 역사의 향기나 박물관 유물의 편린에서 느껴지는 과거의 추억은 인간 존재만이 느끼고 깨닫는 그 어떤 품격이라고 생각한다. 죽지 않는 역사의 유물들, 아니 죽어서는 안 될 인류사의 흔적들을 가리켜 우리는 ‘문화재’라고 부른다.

외국을 넘나들면서 이들 나라와 비교해 우리의 문화유산들이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뜻 있는 많은 이들은 우리 문화재의 보존 관리 상태가 절망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며칠 전의 일이다. 국보 문화재인 다보탑 석가탑 감은사지서탑 등이 0.6∼1도가량 기울어지고 그들 탑의 석재 여러 곳이 균열 부식돼 훼손이 심각하다는 자료가 국회 국정감사에서 나와 매스컴을 들쑤셔 놓았다. 국민은 우리의 소중한 국보인 다보탑과 석가탑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려앉는 게 아닌가 놀랐다. “다보탑이 0.6도 기울었다고? 큰일이네.” 내 이웃의 한 유식자는 전화를 걸어와 걱정 어린 수다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내 상식으로도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0.6도의 기울기를 어찌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얘기할 것인가.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전문가와 상의했더니 실은 그런 기울기는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으며 설혹 기울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해체 수리한다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덧붙여서 우리 문화재 현실의 심각성에 비하면 이런 기울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내 생각이 옳았다. 도대체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다보탑이 0.6도 기울었다고 온 나라가 떠들썩할 만큼 정교한 나라였던가. 국보인 경주의 나원리(羅原里) 5층 석탑은 보수를 잘못해 그 기울기가 다보탑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심각하다고 한다. 그밖에도 방기돼 있는 우리 문화재가 얼마나 많은지 일일이 손꼽기 힘들다. 0.6도가 아니라 수십도 기울어진 문화재 정책의 안목이나 국민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더 큰 문제가 아닌가 한다.

최근의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석굴암 경내에 석굴암 모형관을 건립하겠다는 안을 불국사와 문화재청이 냈고 문화재위원회에서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알려지자 학계와 사회단체가 들고일어났다. 가장 공식적인 문화재 기구들이 어찌 이렇듯 인위적으로 문화재를 훼손하려는지, 이런 안목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찌 우리 문화재를 맡길 것인지 의아심이 꼬리를 문다.

▼끝없이 파괴되는 문화재▼

석조(石造) 문화재는 그렇다 치고, 목조(木造) 문화재의 관리 또는 수리 복원의 현장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면 아마 모두 놀랄 것이다. 건축재료의 선택에서부터 시공업체의 수준, 기술자들, 그리고 감리 체계는 내가 알기로는 절망적이다. 전적(典籍) 문화재의 지정과 관리 역시 그렇다. 더 넓게는, 끝없이 파괴되고 있는 자연 문화재는 어떠한가.

이번 기회에 문화재 전반에 대한 정책과 문화재 인식의 ‘기울기’를 정확하게 계측하고 그 대책을 숙고했으면 한다.

이기웅 출판사 열화당 대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