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 칼럼]「사진정치」와 남북관계

  • 입력 1998년 11월 13일 19시 02분


백악관은 대통령의 국민적 이미지와 관련해 신문의 H(헤드라인:제목), P(픽처:사진), C(캡션:사진설명), Q(쿼테이션:‘오늘의 말’에 대통령의 말이 얼마나 인용되어 있는가)를 중시하는데 네 가지 가운데 두 가지가 사진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사진 정치’의 중요성을 그대로 말해준다.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과 르윈스키 사이의 성추문이 언론에 공론화되기 시작하던 지난 여름에 클린턴이 부인 힐러리를 포옹하는 사진을 백악관이 공개한 것도 말하자면 ‘사진 정치’의 한 단면이었다.

▼ 정회장-김정일의 사진

‘사진 정치’는 지난날 공산권에서 더욱 활발했다. 구소련의 10월혁명 직후에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레닌을 중심으로 찍은 사진이 한 장 있다. 스탈린은 레닌이 죽은 뒤 후계투쟁에서 경쟁자 트로츠키를 누르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레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자신을 레닌 바로 옆에 있던 트로츠키와 바꿔치기 한 조작된 사진을 당의 선전물에 널리 활용했다. 그는 또 레닌과 자신만이 다정스럽게 앉아 있는 사진을 조작함으로써 자신이 일찍부터 레닌의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도 ‘사진 정치’에 능숙했다. 스탈린이 죽은 뒤 어느 시점에 인민일보는 1면 머리에 마오는 스탈린의 바로 곁에 서있고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진을 크게 내보냈다. 기술자들이 손을 댄 것으로 추정된 이 사진을 통해 마오는 앞으로 세계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이 스탈린에게 가까이 서 있던 자신에게 넘어와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최근 현대그룹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이 평양에서 김정일(金正日)과 함께 지난달 30일에 찍은 두 장의 사진 역시 북한판 ‘사진 정치’의 단면을 보여 준다. 한 장은 정회장이 가운데 서 있는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김정일이 가운데 서 있는 사진이다. 북한에서는 첫번째 사진은 공개되지 않았다. ‘태양’이 어떻게 옆에 설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오로지 김정일이 가운데 서 있는 사진만 10월 31일자 ‘노동신문’ 1면 머리를 통해 공개됐다. 우리의 경우 두 사진 모두가 공개됐다.

▼ 경협도 지나치면 곤란

그러나 김정일이 옆에 선 사진은 김정일이 정회장 숙소를 ‘예방’했다는 설명과 더불어 크게 보도되어 김정일이 ‘어른을 존중하는 지도자’라는 인상이 국내에 부분적으로 확산됐다. 김정일은 ‘공화국용 사진’과 ‘남조선용 사진’을 함께 만들어 줌으로써 남북한 모두에서 ‘사진 정치’의 효과를 극대화한 셈이다.

‘이미지’가 ‘본질’을 압도하는 시대인 탓인지 국내의 관심이 사진과 김정일의 ‘경로’에 쏠리다보니 분석의 초점이 흐려졌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김정일이 어떻더라”는 표피성 화제보다는 현대와 북한사이의 계약내용,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와 같은 내용의 ‘경제협력’이 남북관계의 현재와 장래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냐에 대해 날카로운 논의가 집중돼야 한다는 뜻이다.

필자는 남북경협을 지지한다. ‘비교우위’에 서 있는 우리쪽이 경제파탄에 빠진 북한을 돕는 것이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궁극적 평화통일에 이바지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에 주기로 약속된 금액의 크기를 보노라면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過猶不及)’는 공자님 말씀을 떠올리게 된다. 국제통화기금(IMF)관리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우리 경제형편을 고려할 때 과연 우리가 감당할 만한 규모인가 묻게 되는 것이다.

▼ 다시 고개드는 핵의혹

마침 북한 핵에 대한 의혹이 미국에 의해 다시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핵개발이 진행되고 있다고 추정되는 지역에 대한 사찰이 실시되어 그 의혹을 씻기 전에는 94년의 제네바 합의를 존중할 수 없다는 선까지 와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16일 방북하는 찰스 카트먼 미 한반도평화회담 특사의 활동이 주목된다. 미국의 핵 사찰 요구에 대해 북한은 응하는 대가로 돈을 줄 것을 요구하고 있고 이에 대해 미국은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앞으로 미―북 관계가 어떤 기류를 탈 것인지 주시되는 시점이다. 따라서 대북 지원과 관련해 미국과의 조율이 더욱 중요해졌다. 교류와 협력은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국가안보 역시 중요하다. 북에 대한 시혜중심적 대북정책을 한 번쯤 신중하게 다시 따져보아야 할 때가 아닐까.

김학준(인천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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