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박영숙/"유서를 씁시다"

  • 입력 2001년 12월 2일 18시 03분


미국 테러사건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단순한 비행기 사고도 극도의 긴장감을 안겨주며, 새로운 규모로 펼쳐지는 전쟁의 피해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이제 우리는 갑자기 엄습할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고, 한 해를 마무리지으며 내가 아직 하지 못한 일들이 어떤 것인지 되돌아본다. 자신을 정리할 계기로 단연 유서 쓰기를 제안하고 싶다. 미국 테러사건 때 본 유언의 대부분은 남는 자에 대한 배려였다. 몇 초 후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을 알고 휴대전화로 남편 아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은 그들이 남긴 마지막 말들은 놀랍게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 남아야 할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말이었다. “사랑하고 있으며 영원히 사랑할 것이고, 나를 위해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하는 마지막 배려. 한 남자는 여동생에게 두 사람간에 불필요한 오해가 있었음을 후회하며 마지막으로 모든 맺힘을 풀어주었고, 어떤 남편은 아내가 탄 비행기가 곧 추락할 것임을 용기 있게 알려주어 단 몇 초 동안이라도 아내가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주기도 했다.

우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한국인에게 살아남을 자들에 대한 배려는 아직은 생소한 말인 것 같다. 대부분은 유서나 유언의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기회가 주어지는 사람도 자신이 죽기 때문에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는 말이나 모든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주고 용서해주기를 바라면서 마지막을 맞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못하며, 맺힘을 풀고 한을 던지지 못하고 간다. 죽으면서까지 한 맺히는 말을 해 살아 남을 자들에게 엄청난 부담과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우리 조상들은 부모가 사망하면 3년간 자신들을 위해 슬퍼하라고 강요했다. 이렇게 서구인들의 문화와는 판이하게 달랐던 우리에게도 차츰 죽음에 대한 준비문화가 싹트고 있다. 유명 인사나 젊은 세대에 유서 쓰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며, 유언으로 재산의 1%를 사회에 환원하자는 운동까지 펼쳐지고 있다.

우리는 유언을 쓰는 이유로 자신을 정리하고 반성하며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긍정적으로 맞기 위해,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결산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유언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을 사람들, 자신을 보낸 뒤 슬퍼하고 고통받을 사람들,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마지막 배려이어야 한다. “나는 행복했다, 나를 위해 슬퍼하지 말라”는 아량은 어떤가.

유서는 또 자신의 일시적 울분을 표하거나 죽고 싶은 순간에 쓰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유서는 진지해야 한다. 내가 간 뒤 남을 자들에게 그들의 불편을 덜어주고, 그들을 한동안 보살펴 줄 재정적 지원을 보장하거나, 그들에게 내가 다 갚지 못한 빚을 알려주어 내가 죽고 난 뒤 손해를 보고 고통받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한다.

이 같은 유언 쓰기 운동은 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인 한국이 아직도 우리 아이들을 다른 나라에 수출해야 하는지, 왜 국내 입양이나 수양부모제의 활성화가 어려운지 그 숙제를 풀기 위한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사단법인 한국수양부모협회’ 회장으로 일하면서 입양 활성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 재산상속임을 알게 됐다. 피가 섞이지 않은 입양아, 또는 수양 아동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일이 부담스러워 아예 입양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유서 쓰기가 보편화되면 유서에 반드시 상속 분배를 적게 되어 있어, 법적 분쟁을 방지할 수 있고 자신의 뜻대로 재산을 나눠줄 수 있다. 이에 따라 국내 입양이 활성화돼 고아수출국이란 오명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유서는 말장난이나 감상적인 수필이 아니라 치열함과 절실함을 가진 글이다. 서구사회에서 유서는 진정 심각한 존재의 종말과 남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쓰여지는 것이다.

연말이 되어 사람들은 꽁꽁 묶어두었던 마음을 풀고 남에 대한 배려와 나눔을 생각한다. 유서를 쓰면서 지금까지 자신의 삶과 인간과 물질관계를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남에 대한 자신의 배려를 담을 수도 있다. 유서 쓰기는 결국 나를 사랑하다 내가 없어져 눈물 흘릴 가족들에게 나를 그리워하지 않도록 하는, 그들을 위한 배려일 수밖에 없다.

박영숙(호주대사관 문화공보실장·한국 수양부모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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