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조은/아버지, 그땐 몰랐습니다

  • 입력 2001년 5월 6일 18시 34분


그를 알게 된 것은 한 달 전이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가 우리 동네에 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 동석했던 후배와 나는 약속이나 한 듯 구체적으로 그의 집을 알고자 했다. 후배도 나처럼 그와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너무도 눈에 익은 언덕 아래 붉은 벽돌집이 그의 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반가움이란! 그의 집은 주변의 시끌벅적한 집들과는 다르게 있는 듯 없는 듯 언제나 조용하다. 조용하기 때문에 더욱 눈에 띈 집에서 그는 살고 있었던 것이다. 수없이 그 앞을 지나다니며 담 위로 솟아오른 정원수들을 감질나게 올려다본 후배와 나는, 기회가 되면 정원을 한 번 보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고, 그는 선선히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했지만, 정말로 그의 집 정원에 발을 들여놓게 되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모란 핀 정원에서 삶을 느껴▼

바로 어제, 그 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정원에 초대되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조용하기만 하던 그 집에서는 4대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정원으로 들어서자 활짝 핀 모란이 우리를 반겼다. 우리가 앉을 자리는 모란 옆에 마련되었다. 전날까지도 봉우리였던 모란꽃이 하루 사이에 만개했다는 가족들 말에서 모란이 피었을 때 손님을 초대한 기쁜 마음이 전해졌다. 내게도 그런 정원이 있고, 한켠에서 모란이 꽃을 피웠다면, 아마도 그 같은 마음이 되었으리라.

우리를 초대한 사람이 그의 장인이었기에 처음엔 행동거지가 무척 조심스러웠는데, 정원 한쪽에 숯불을 피워 민물장어를 굽던 그 분의 대금 연주가 시작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의 마음은 격식 없이 활짝 열렸다. 귀한 술과 음식을 앞에 놓고 음악을 들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내려다보니 우리에게 앉을 자리를 내주느라 다른 곳으로 옮겨 심어진 키 작은 일년생 꽃들도 불만이 없는 듯 명랑해 보였다.

평생 교직에 몸담고 있다가 은퇴한 그의 장인은 육체와 정신이 젊은이보다 유연하고 활달한 분이었다. 평생 평교사만을 고집하며 살았다는 그 분의 삶이 설명 없이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나는 그 분을 바라보며 한 번 다녀가라는 전화를 몇 통이나 받고도 찾아가 뵙지 못한 나의 노부모를 생각했다. 아버지가 처음 농사를 지었을 때의 보잘 것 없던 결실과, 그 형편없는 농사일을 만회할 만큼 싱싱하게 가꿨던 꽃들도 눈앞에서 흔들리는 듯했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 만큼이나 꽃을 가꾸는 일도 의미가 있다고 그때 우리가 생각할 줄 알았다면, 최소한 아버지의 삶이 지금보다는 훨씬 풍요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시절 우리 형제들은 삶의 부조리한 면면을 노려보느라 다른 일에는 시큰둥했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몰랐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집 마당처럼 어제 우리가 둘러앉아 담소했던 그 정원도 이제 곧 과거 속으로 자리를 옮길 것이다. 9월이면 우리 집 바로 아래까지 재개발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 때문이었을까. 단소 연주 후 그 어른이 정철의 장진주사 를 읊었을 때 나는 기억해 두고 싶은 눈앞의 풍경을 머릿속에 누룩처럼 띄우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보게 되었다.

▼따뜻한 본성이 깨어나는 기척▼

그의 가족들은 모두 인자했고, 서로에 대한 말없는 배려가 눈빛과 손끝에서 느껴졌다. 가족들과 알게 모르게 부대끼며, 때로는 싸우며, 힘들게 의사를 소통하며 살아온 내게 그들의 모습은 조용히 벽에 걸려 있는 명화(名畵)처럼 삶의 아름다운 본질을 갈망하게 하는 강한 힘이 있었다. 난생 처음 먹어본 과자(가죽나무 껍질을 재료로 하여 담백하고 바삭하게 직접 만든 과자)와 된장찌개 역시 환상적인 맛이었는데, 인색하고 옹고집만 남은 이웃 노인들로 인해 최근 마음이 스산했던 나는, 분명 내게도 존재하고 있을 따뜻한 본성이 깨어나는 기척을 느꼈다.

"만일 다시 그 집에 놀러 가게 된다면, 대금 연주에 대한 답례로 시조라도 한 수 멋있게 읊어야겠어. 우린 답례를 하지 못했던 것 같아."

함께 그 집에 갔던 후배가 아침에 들러 말했다. 오래 혼자 사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건조해졌을 그녀에게도 그 가족이 분사해준 습기와 향기는 엄청나게 강했던가 보다.

조 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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