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은아야, 3년을 기다렸지… 이젠 하늘나라로 가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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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화상재판으로 코스타리카 뺑소니범 자백 받아내

화면 속 상대는 코스타리카 법정에 선 피고인. 3년 전 전모 씨(사진 뒷모습)의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었다. 전 씨는 “용서를 빌라”며 사진을 내밀어 보였고 결국 피고인은 잘못을 고백했다. 서울중앙지검 제공
화면 속 상대는 코스타리카 법정에 선 피고인. 3년 전 전모 씨(사진 뒷모습)의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장본인이었다. 전 씨는 “용서를 빌라”며 사진을 내밀어 보였고 결국 피고인은 잘못을 고백했다. 서울중앙지검 제공
“당신이 용서를 빌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여기, 내 딸이에요.”

그제야 노트북 화면 속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미안합니다….” 이 사과를 받기까지 3년이 넘게 걸렸다.

파견근무 중인 남편을 따라 코스타리카에 살고 있던 전모 씨(41)는 2009년 11월 3일, 일곱 살 딸 은아(가명)의 손을 잡고 도로변을 걷고 있었다. 학교에 데려다 주던 길이었다.

‘쿵.’ 순식간에 은아가 30m쯤 튕겨 나갔다. A 씨(66·여·캐나다 국적)가 차로 들이받은 것. 전 씨도 충격으로 넘어져 기절했다. A 씨는 차에서 내렸다가 이내 도망쳐 버렸다. 뇌사 판정을 받은 은아는 4일 뒤 세상을 떠났다. 그날은 은아의 생일이었다.

폐쇄회로(CC)TV를 통해 사고 당일 경찰에 붙잡힌 A 씨는 “사람을 친 기억이 없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차로를 걸은 아이 잘못 아니냐”고도 했다. 비가 많이 온 그날, 수풀로 덮인 길 안쪽은 질퍽거렸다. 인도와 차로의 구분이 없었고, 바깥쪽으로 다니는 사람도 많아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 그래도 은아를 바깥쪽에서 걷게 하지 말걸….’ 엄마는 가슴을 쳤다.

가족은 다음 해 1월 귀국했다. 재판은 열릴 기미가 없었다. 가슴은 새까맣게 타 들어갔다. 한 줄기 빛이 보인 건 지난해 12월 18일. 코스타리카 당국이 한국 법무부에 국제형사사법공조 요청서를 보내왔다. 국제형사사법공조는 범죄 수사나 재판과 관련해 국가 간 증거수집, 진술확보 등을 공조하는 제도. 이에 따라 코스타리카에서 화상재판을 열기로 했다. 1991년 국제형사사법공조법이 제정된 이후 국내에서 화상으로 외국 재판에 참여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달 29일 오전 7시 반에 열린 화상재판에 전 씨 가족이 참여했다. 서울중앙지검 외사부 홍석기 검사(36·사법연수원 33기)도 배석했다. A 씨 변호인은 “유족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3년, 합의금 2만 달러를 수용해주면 사실대로 말할 의사가 있다”고 전해왔다. 조건을 받아들이자 A 씨가 마침내 자백했다. “그동안 너무 힘들었습니다. 유족에게 연락하고 싶었는데, 변호사가 지금 바로 접촉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해서…. 미안합니다.” 통역관이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기도 전에 전 씨의 울음이 터졌다.

전 씨는 떨리는 손으로 은아의 사진을 컴퓨터 화상 카메라에 비춰 보였다. “나 말고 우리 딸에게 미안하다고 해 달라”면서. 은아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A 씨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양쪽 정부와 검찰이 움직이니 겁을 먹고 죄를 인정한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 와 흘리는 가해자의 눈물에 무슨 진정성이 있겠어요.” 6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전 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최종심까지 가려면 10년은 걸릴 것 같아 합의했지만, 이제라도 사과를 받아내 아이를 제대로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화상재판#코스타리카#뺑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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