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

  • 입력 2008년 4월 11일 02시 59분


열창이었지만 방청석은 조용했다. “노래 좋죠?” 사회자가 세 차례 되물은 끝에야 관객들은 어색하게 호응했다. 앳된 얼굴의 무명 가수는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난 알아요’를 알아보지 못한 건 심사위원도 마찬가지였다. 가사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속사포처럼 ‘내뱉으며’ 무대 위를 방방 뛰는 모습이 못내 낯설었다. 작곡가 하광훈 씨는 “멜로디 라인에 신경을 안 쓴 것 같다”고 했고, 연예평론가 이상벽 씨는 “춤에 치중해 노래가 묻혔다”고 했다.

평점은 10점 만점에 7.8점. 신곡 소개 프로그램 진행자 임백천 씨는 신인의 어깨를 감싸며 “100점 만점에 80점은 맞은 것”이라고 위로했다. 1992년 4월 11일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렇게 데뷔했다.

하지만 브라운관 밖 반응은 달랐다. ‘난 알아요’, ‘환상속의 그대’ 등이 수록된 1집 앨범은 발매 3주 만에 3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더니 두 달 새 100만 장이 팔렸다. 각종 가요차트에서도 17주 연속 정상을 석권했다. 50분짜리 랩댄스 음반 1장이 트로트와 발라드 위주였던 가요계의 질서를 뒤흔든 것이다.

젊은 세대는 ‘새 것’에 목말라 있었다. 그해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탈정치화가 시작됐고 경제호황으로 생활이 넉넉해지자 문화적 갈망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헤비메탈에 랩과 댄스를 버무리고 트로트까지 가미해 ‘장르의 공식’을 깬 서태지는 그 욕망의 완벽한 배출구였다.

서태지의 등장은 ‘X세대’를 탄생시킨 문화적 사건이기도 했다. 권위주의에 도전하려던 10대들에게 서태지의 노랫말은 성경과 같았다. ‘질문 말고 달달 외라’는 교사들을 향해 X세대는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라고 반항했다.

앨범마다 혁명적 변신을 거듭하던 서태지는 “새장에 갇힌 새는 똑같은 노래만 부른다”는 말을 남기고 1996년 은퇴했다. 데뷔 3년 10개월 만이었다. 그는 떠났지만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데뷔 15주년 기념공연은 예매 10분 만에 전 좌석이 매진됐다. 서태지 없이 후배 가수들만 참여했는데도 그 정도였다.

서태지의 성공은 가요계의 그늘을 만들기도 했다. ‘태지 열풍’을 확인한 대형기획사들이 아이돌 댄스그룹을 경쟁적으로 양산하면서 대중음악의 다양성은 오히려 위축됐다. 이들은 음악을 발판 삼아 ‘만능 엔터테이너’로 진화할 뿐 가요계의 밑거름이 되지 못했다.

음악밖에 모르는 ‘어수룩한’ 신인이 그리운 요즘이다. 상고머리에 은테 안경을 쓴, 그를 알기엔 아직 시간이 필요했던 때의 그 서태지처럼.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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