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38년 加노먼 베순 중국行

  • 입력 2008년 1월 2일 02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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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인과 부패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그 모순을 묵과할 수 없다오. 나는 우리가 태만한 탓에 탐욕스러운 자들이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이들을 살육하는 것을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소.”

1938년 1월 2일, 고국 캐나다를 떠나 중일전쟁의 전장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노먼 베순은 전 부인인 프랜시스에게 작별의 편지를 썼다. 편지는 유서처럼 비장했다. 이미 스페인 내전 때 종군 의사로 활동했던 그에게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리 없었다. 하지만 전장에서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베순의 의지를 꺾진 못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중국 북부. 일본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마오쩌둥이 이끄는 8로군 부대가 세운 군사기지였다. 베순은 그곳에서 하루 스무 시간 가까이 일하며 중국군 부상병들을 돌봤다. 수혈에 무지했던 중국인들을 설득해 최초의 민군합동 헌혈부대를 조직하고 20여 곳에 기지 병원을 세워 수술실을 만든 것도 그였다.

베순의 의료 활동은 뒷일을 수습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의료요원들을 위한 의학 교재를 집필하고 병원 부속학교까지 세웠다. 그는 의료란 단순히 의사 개개인의 기술이 아닌, 경제 행정 사회적 기반을 통해 시스템적으로 실현돼야 한다는 철학을 갖고 있었다.

노먼 베순은 공산주의자였고, 일제 침략에 대항한 중국군의 편에 섰지만 그의 신념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었다. 그는 일본군 포로 역시 중국군과 똑같이 돌봤다. 또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손잡고 일본군과 싸웠던 장제스의 국민당 군의관들이 자기 부대 병사들만 치료하는 것에 분노했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대규모의 어리석은 행위’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했다. “왜 무수한 일본인이 이곳까지 와서 무수한 중국인을 시체로 만드는가? 그게 그들에게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이 선량한 일본인들에게 살인 임무를 맡기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의 행적은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중국인들은 이 파란 눈의 서양인을 ‘바이추언(白求恩)’ 선생이라고 불렀다. 베순의 중국식 발음을 딴 이름이자 ‘우리를 구해 준 백인 은인’이란 뜻이다.

1939년 11월, 그는 맨손으로 수술하다 벤 상처가 덧나 패혈증으로 사망해 중국의 순교자 묘지에 묻혔다. 마오쩌둥이 “한 인간의 서거 이상을 통곡한다”고 애도했듯 그는 지역과 이념을 초월한 휴머니즘의 상징이 됐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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