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남상천씨 “네시간만 연습하면 速記일기 써요”

  • 입력 2004년 3월 9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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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식 속기 개발자인 남상천씨가 속기 메모의 편리성을 도해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식품사업에서 얻은 재원을 바탕으로 대학생과 일반인을 위한 속기 보급에 여생을 바치고 있다.   -박영대기자
남천식 속기 개발자인 남상천씨가 속기 메모의 편리성을 도해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식품사업에서 얻은 재원을 바탕으로 대학생과 일반인을 위한 속기 보급에 여생을 바치고 있다. -박영대기자
“속기(速記)에는 내 평생의 열정과 꿈이 녹아 있습니다. 누구나 익혀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만드는 게 내게 남은 유일한 숙제예요.”

한국 속기술의 원로인 남상천(南相天·75) 남천속기연구소장. 그는 ‘속기의 전도사’로 불린다. 최근 자판을 사용한 ‘컴퓨터 속기’가 보급되면서 손으로 기록하는 ‘수필(手筆) 속기’는 점차 설 땅을 잃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해 천안대를 시작으로 대학 수필속기 강의가 부활하기 시작했다. 서울 시내에서도 성균관대와 홍익대가 수필속기 강의를 진행 중이다.

지난해 성균관대에서 ‘속기 지도자과정’을 열고 여러 학교를 찾아다니며 설득을 반복하는 등 남씨의 집념어린 노력이 이뤄낸 성과다.

“컴퓨터 속기에도 장점은 있더군요. 해독과정 없이 입력하는 그대로 한글 문서화된다는 점이죠. 그렇지만 수필속기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엄청난 장점이 있어요. 바로 ‘생활속기’라는 점이죠.”

그는 더 이상 속기가 ‘직업’으로 애호되던 시대는 지났다고 말한다. 한번 취직하면 평생이 보장되는 속기계에서 새 인력이 진입하기란 ‘하늘의 별따기’가 됐기 때문.

그는 “이제 속기는 강의를 그대로 받아 적고, 떠오르는 생각을 빨리 메모할 수 있는 ‘생활속기’로 접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남천식 속기법’을 창안한 것은 27세 때인 1956년. 한글 자모의 출현 빈도수까지 면밀하게 계산한 ‘과학성’ 때문에 편리한 속기법으로 곧바로 인기를 끌었다.

농림부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시간을 쪼개 속기 지도교사 강습회를 열고 ‘속기’를 실업계 고등학교 교과과정으로 채택하게 하는 등 보급에 온 힘을 쏟았다.

“공무원이기 때문에 돈 버는 강의는 할 수도 없었어요. 오히려 교재를 배포하느라고 돈을 쏟아부었지.”

그러던 그의 일생에 전기가 마련됐다. 1980년 농협중앙회 검사부장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한 그에게 한 일본 식품업체가 ‘보리 가공법을 한국에 도입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당시 인기가 폭발하던 보리음료 원료 가공에 뛰어들었다. 쏠쏠하게 재미를 보던 그에게 또 한 가지 대박이 터졌다.

그가 특허를 얻은, 현미를 쪄서 볶는 가공법이 음료회사의 눈에 띄었던 것. 현미음료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원료인 현미는 전부 남씨의 회사에서 공급했다. 매달 거액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지난해 그는 미련없이 회사를 처분했다. 회사의 인도대금을 남김없이 속기 보급에 쏟아붓기 위해서다.

“네 시간만 연습하면 느릿하나마 속기로 일기를 쓸 수 있어요. 30시간을 집중 연습하면 남의 말을 받아 적을 정도가 되죠. 속도가 강조되는 정보화 시대에 얼마나 편리한 일입니까.”

그는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라고 써보였다. 한글로 52획. 그는 이 문장을 속기로 다시 적었다. 13획으로 줄었다. 한 획을 긋는 방향과 길이로 자음을 표시하고, 획 끝의 구부림으로 모음을 처리하므로 한 획이 한글 한 자에 해당한다. 이를 단순화한 약법(略法)을 사용하자 단 6획으로 줄어들었다.

“그렇죠? 정말 편하죠?”

그의 목소리가 신명을 띠었다.

그의 목표는 3년 내에 서울시내 20개 대학에서 속기가 교양과목으로 채택되게 하는 것. 최근에는 10억원대의 자택을 모교인 성균관대에 기증하기로 약속했다. 교내 속기연구소를 설립하고, 속기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 위해서다.

최근 그에게 또 다른 고민이 찾아들었다. 대학교에서만 속기를 배울 수 있다면, 일반인은 어떻게 속기를 배울 수 있을까. 그래서 그는 웹사이트(www.namcheonsokki.com)를 열었다.

속기를 배우기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공개자료를 다운받아 인쇄하고 자습할 수 있다. 혼자 시험을 보고 결과를 보내면 채점까지 해주는 ‘친절한’ 사이트다.

“오늘부터 댁에 가서 인터넷으로 바로 시작해 보세요. 얼마나 생활이 편리해지는지 곧 느끼게 될 겁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그에게서, 평생을 바쳐온 일을 값있게 마무리하고자 하는 진지함이 느껴졌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남소장은

△1929년생

△1956년 남천식 속기문자 창안

△1959년 성균관대 법정대 법률학과 졸업

△1964년 상업계 고등학교 국정교과서 ‘속기’ 발간

△1967년 사단법인 한국속기교육협회 이사장

△1971년 농림부 서기관

△1978년 농협중앙회 검사부장

△1984년 식품가공업체 대경산업 대표

△2002년 남천속기연구소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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